대중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요즘 <이오덕의 글쓰기>란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
예전에 저자의 다른 책들을 읽고 감명받은 적도 있지만, 특히 이 책에서는 어린이들이 자신의 말로 자기 이야기를 진솔하게 쓰도록 도와야한다는 저자의 신념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평생 글쓰기 교육에 대해 진심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이오덕 선생은 '삶을 가꾸는 글'을 쓰려면,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를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그는 글짓기란, "삶을 떠나 거짓스런 글을 머리로 꾸며 만드는 흉내내기 재주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p.99). 아마 누군가를 의식하고 작위적으로 글을 짓지 말고, 마음의 흐름대로 솔직하고 소박하게 글을 써내려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글짓기'도 때론 필요하단 조언을 하려 한다. 단, 방송 글쓰기에 한정해서 말이다.
방송글은 그것이 라디오이든, TV이든 글을 써내려가기 전에 선배들의 글을 흉내내고, 시청자를 철저히 의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첫째, 방송글은 혼자서는 결코 완성할 수 없는 형태의 글이기 때문이다. 방송계가 암묵적으로 동의한 문법에 따라써야 한 작품을 같이 만드는 다른 창작자들, 예를 들어 PD나 카메라감독, 오디오감독, 출연자 등이 구성안과 대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맡고 싶은 장르의 방송 대본을 미리 구해 형식과 내용을 흉내내서 익숙해져야 한다.
둘째, 방송글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글보다는 타인, 즉 시청자가 원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글이 되어야 한다. 제작진의 생각과 감정, 주장들을 쓰기에 앞서, 보다 많은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지, 그들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 글인지 자문하고 재단하며 글을 써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방송글은 쓴다기 보다 짓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방송글은 글 자체로는 작품이 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글과 음악이 만나거나 글과 영상이 만났을 때, 아니 음악이나 영상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었을 때 방송글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훌륭한 조연이 되기 위해 방송글은 쓰기 전에 더 치밀한 준비를 한 후 작정하고 '짓기'를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짓기'의 개념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전 과정에서 유용하게 쓰인다. '짓는다'는 말은 어떤 재료들을 가지고 하나의 완성품을 만든다는 뜻이다. 방송글에서는 주위에 모든 사물과 현상들,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이 재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재료들로 프로그램을 완성시키려면 다음의 글짓기 과정이 필요하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는 먼저, '관련 짓기'를 해야 한다. 방송 장르와 소재, 시청자들의 욕구 등을 서로 관계 맺게 연결하는 과정에서 'Something New'가 나온다. 만약, 제작진이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는 여행에시들해진 대중의 욕구를 읽었다고 가정하자. 그럼 여행지에서 현지인의 삶을 직접 살아보는 새로운 여행 트렌드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여기에 예능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의 특성을 혼합해 인기를 얻고 있는 '리얼리티' 장르를 연결한다면 어떨까? 그리고 출연자는 시청자들이 만나고 싶고, 일상을 엿보고 싶어하는 연예인으로 정한다면? 이렇듯 여러 현상과 방송 형식, 화제의 인물 등이 관계를 맺도록 부지런히 연결하다보면 우리도 언젠가 '효리네 민박'과 같은 화제의 프로그램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방송 글짓기의 두번째 과정은 '갈래 짓기'다. 이는 구성의 단계라 할 수 있다. 도시인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가진 섬에서 무엇을 해보고 싶을까? 일반인들은 동경하던 연예인의 집에서 어떤 경험을 하기를 원할까? 이런 질문과 대답들을 반복하며 항목으로 정리해서 일단은 두서없이 나열한다. 그 후 비슷한 항목은 묶고 다른 성격의 항목들은 구분을 지어 경계를 명확히 한다. 그리곤 첫 장면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후, 한 시간동안 그 마음을 밀었다 당겼다하며 관심이 이어지도록 각 항목들을 배치시킨다. 이렇게 갈래 지은 항목들의 순서까지 정하고 나면, 촬영의 방향키가 되는 구성안이 완성된다.
방송 글짓기 마지막 단계는 '의미 짓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구성안에 따라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면, 이제 편집과 대본쓰기가 남았다. 같은 촬영본이라도 누구의 손길을 거치는가에 따라 프로그램의 질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하루동안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편집할 수도 있고, 하루 중 가장 긴장감 있는 순간을 처음에 보여주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라는 궁금증을 품게 할 수도 있다. 출연자들이 함께 노을을 바라보며 방송이 끝나는 장면에서 '인연'에 관한 자막을 넣을 수도 있고, 출연자들의 인터뷰로 마무리할 수도 있다.
이처럼 프로그램의 처음을 어떻게 여는가, 끝을 어떻게 마무리하는가에 따라, 그 방송이 지향하는 바가 드러난다. 그리고 편집된 장면이나 인터뷰 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방송의 의미, 즉 제작진이 전달하고픈 메세지가 정해진다.
아마도, 아동문학가이자 교사이기도 했던 이오덕 선생님이 '글짓기'가 아닌 '글쓰기' 교육을 해야한다는 조언을 남긴 이유는, 아이들이 자기 삶을 떠나 거짓의 글로 자신을 표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신념은 방송 글쟁이들에게도 분명 큰 울림을 준다.
방송글은 오롯이 자기를 표현하는 글이 될 수 없고, 끊임없이 타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써야 하는 글이다. 하지만 시청자의 삶이 곧 나의 삶이란 생각으로 글을 짓다 보면 언젠가 '글짓기'를 해도 '글쓰기'가 되어, 누구나 감동하고 공감하는 글을 쓰는 경지에 오르게 될 것이다. 결국, 최고의 방송작가는 대중의 삶을 가꾸는 글짓기, 아니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