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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ul 09. 2017

방송작가와 시간의 역학관계

시간이라는 굴레 혹은 마법을 쓰다!


우연한 자리에서 알게 된 분과 따로 만나기로 한 날, 약속 장소에 10분 전에 도착했다.그리고 기다리는 10분이 아까워 가방 속 책을 집어 들었다.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데 메시지가 왔다. 10분만 늦겠단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책을 읽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인이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에서 25분이 흘렀다.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론 이 사람과 공적인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시간약속에 꽤 예민한 편이다. 같이 작업할 때 시간을 엄수하지 않는 동료는 매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한, 두 번 정도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는 것은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늦는 것이 습관이고, 마감시간은 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 결과물이 좋아도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왜 그럴까? 아마 시간이 ‘금’과 같이 쓰이는 방송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서일 것이다.

먼저, 편성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그 채널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개념이니, 방송과 시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프로그램 기획 때부터 시간은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같은 교양정보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편성되는 시간이 아침 시간대인지, 저녁 시간대인지에 따라 제작 방향부터 아이템 선택, MC와 출연자, 스튜디오 디자인 등등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리고 방송일시를 잠정적으로 정할 때도, 촬영 기간은 얼마나 걸리고, 후반 작업에도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될 것인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늘 시간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는 방송 제작 과정 중, 특히 시간에 민감한 과정은 편집과 대본이 완성되는 단계일 것이다. 편집을 하고, 대본을 쓸 때 방송 스토리텔러에게 시간의 단위는 상상이상으로 잘게 나눠진다.


예를 들어, 영상 편집 과정에서 '초당 프레임 수(FPS, Frame Per Second)'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는 1초에 몇 개의 정지화면이 나타나는지를 뜻하는 말로, 보통 영화나 TV에서는 초당 24프레임이 기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영상을 편집할 때 심하면 1/24초 단위로 이 화면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방송작가들이 대본을 쓸 때, 하얀 백지를 가장 먼저 채우는 것도 장면의 내용과 그 장면이 흐르는 시간이다. 이 과정을 보통 ‘타임체크’라고 한다. 방송 원고는 화면의 길이와 내레이션 또는 멘트 길이가 정확히 맞아야 한다. 그래서 타임체크를 먼저 하고, 그 시간 길이에 맞춰 빈 공간을 채운다는 생각으로 문장을 써나간다.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보통 A4용지에 방송 원고를 쓸 때, 원고를 반으로 나눠 왼쪽에는 비디오, 오른쪽은 오디오 내용을 쓴다. 나의 경우, 오디오 부분에 쓴 한 줄의 원고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대략 4초가 나온다. 8초간 이어지는 장면을 글로 채우고 싶다면 2줄, 아무리 많아도 3줄을 넘어서선 안 되는 것이다.

이렇듯 방송은 시간이라는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굴레가 때론 마법처럼,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감시간’이다. 방송 작가들은 프로그램 제작의 매단계마다 보이지 않는 마감시간과 씨름한다. <6시 내고향>을 예로 들면, 방송일 일주일 전에는 섭외가 되어야 하고, 삼일 전에는 촬영을 마쳐야 하며, 하루 전에는 편집이 끝나야 하고, 생방송 3, 4시간 전에는 원고 및 자막이 완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험공부를 할 때 마지막 5분 동안 외운 내용은 잊혀 지지 않듯이, 방송을 제작할 때도 마감시간이 되어야 섭외도, 글도 비로소 풀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아이템은 모두 사라진 것 같고, 영상의 빈 공간을 채울 문장이 죽어도 생각나지 않다가도 마감을 앞두면 기적처럼 그것들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십 수 년을 방송하면서 다행히, 마감시간을 넘겨 방송이 펑크 나는 대참사는 겪어보지 않았다. 후배들은 마감시간에 임박해 신들린 듯 구성안이나 대본을 쓰는 나를 보고, 키보드 위에 손가락이 날아다니는 것 같다며 놀리곤 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집중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방송일을 그만둔 지금도 시간에 대한 강박은 남아있다. 약속 시간을 어기는 일이 마치 생방송 시간을 지키지 못한 방송사고처럼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대화가 끊기면 비디오는 나오는데 오디오가 끊긴 것처럼 불안해서 끊임없이 수다를 떨게 만든다. 직업병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시간에 얽매인 습관이 좋을 때도 있다. 내 시간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시간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고, 시간이 돈이나, 금보다 더 가치 있다는 지혜를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다. 마감시간을 정하면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알기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마다 언제 마무리 할 것인지 가상의 마감시간을 정해놓고 나와의 약속을 지키려 한다.

이런 경험들이 모여 나에겐 하나의 신념이 생겼다. 방송 스토리텔러는 시간을 달리는 자, 나아가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 설계를 세심히 잘 하고, 시간의 틈을 효율적으로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시청자의 시간을 훔칠 수 있는 방송 스토리텔러의 중요한 자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과는 같이 일하지 않는다는 나의 편견과 고집은 앞으로도 웬만해선 고쳐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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