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사극을 보는 법
“애들한테 사극을 보여줘도 될까요?”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미디어 비평 강의를 나가면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청중들에게 질문의 방향을 되돌린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세요?”
그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음과 같은 답들이 돌아온다.
“드라마는 왜곡이 너무 심한 것 같아요.”
“드라마 안 봐요. 다큐는 몰라도...”
“사극은 봐도 KBS 것만 봅니다.” 등등.
역사에 관심이 많을수록, 드라마는 그저 오락거리라고 생각할수록 이런 대답을 하는 목소리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결국엔 “애들 있을 땐 TV를 안 봐요.”,
“아예 텔레비전을 없앴어요.”라는 말까지 듣고야 만다.
그럼, 사극은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유해한 존재일까?
사극, 또는 역사극이란 용어는 현대극과 대응되는 개념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등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총칭하는 말이다.
사극은 그 기준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다양한 분류가 가능하지만, 최근에는 정통사극과 퓨전사극으로 나누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정통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재연하는 것에 더 중심을 두는 사극을, 퓨전사극은 역사적 재해석에 보다 중점을 두어 창작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진
허구로서의 사극을 말한다.
물론, 학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장르는 퓨전사극이다.
허구로서의 사극이 드라마 작가나 감독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종종 역사 왜곡이라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어른들은 책에서 접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이 드라마 속 그것과 너무 달라 아이들이 혼란을 느낄 것이라고 걱정한다.
실제, 지난 2014년 방송된 MBC ‘기황후’는 평균시청률 29%가 넘는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50부작이 방송되는 내내 역사왜곡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기황후는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며 국정농단을 행했고, 극 중 왕유라는 인물의 모델이 되었던
충혜왕은 새어머니를 겁탈하는 등 비윤리적 행동을 일삼았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 인물들이 드라마에서는 고난을 극복한 여성 영웅과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순정남으로 미화됐기 때문이다. 결국 제작진들이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며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노선을 걷는다”고 밝혀야만 했다.
그런데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히는 화제작 중에도 퓨전사극이 여럿 있다.
KBS의 ‘구르미 그린 달빛’이나 SBS의 ‘달의 연인 보보경심 려’가 그것이다. 이 드라마들도 방송 초기에는 역사를 왜곡한다는 우려를 비켜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2, 3년 전 ‘기황후’ 때와는 달랐다.
드라마가 역사에 무관심하거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역사 공부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날 수 있었다.
가령, ‘구르미 그린 달빛’의 한 시청자는 드라마의 대사가 인상 깊어 실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았고, 주인공 대사가 순조실록 28권에 실린 효명세자의 상소문 내용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특히 드라마에서 박보검이 맡았던 ‘효명세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청소년들이 조선왕조를 다룬
교양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교과서 밖의 역사책에서 효명세자의 업적을 찾아다녔다는
에피소드들도 이어졌다.
사극을 만드는 제작진들도 역사적 사실과 허구 사이에서 시청자들이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돕고, 오히려 그 차이를 찾는 것이 사극을 보는 색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달의 연인’ 제작진은 드라마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 초기 왕의 계보를 그래픽으로 제작해 공개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광종(이준기 분)이 난폭하고 잔인한 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개혁적인 군주였다는 사실을 알리며,
드라마가 상상력으로 그린 광종의 면모와 인물 관계, 사건 등이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점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그렇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누군가 “아이들에게 사극을 보여줘도 되나요?”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물론이죠. 보여주세요, 더 적극적으로!”이다.
단, 사극을 통해 갖게 된 역사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을 반드시 풀게 한다는 전제하에서이다.
청소년들과 진행하는 미디어 비평 수업에서 사극을 분석해보는 시간은 꽤 인기있는 과정이다. 드라마를 보여주고,
역사적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면서 분석하게 하면 아이들은 그 어느 수업보다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하고 스스로 수업을 이끌어간다.
거기에 스토리텔링의 재미까지 체험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사료의 틀을 벗어난 새로운 결말을 제시하게 하고, 만약 역사가 바뀌었다면 우리의 현재는 어땠을지 가늠하게 한다.
이로써 역사를 배우고 과거 선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된다.
그러니 사극을, 더불어 드라마를 보는 자녀가 있다면 기꺼이 환영하시기를...
드라마는 호기심과 질문, 관점의 변화를 일으키는 유용한 배움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