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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Dec 26. 2017

리듬, 만화, 여백의 미에서 배우는 방송 글쓰기

나에게 맞는 훈련법을 찾자!


“중학생 딸이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데 뭘 연습시키면 되나요?"

얼마 전, 학부모 대상의 미디어 비평 강의를 나갔다. 강의가 끝나자 한 분이 슬며시 다가와 내게 물었다. 시상식에서 방송작가들이 상 받는 것을 보고, 아이가 방송작가가 되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방송작가가 뭐하는 직업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처음 만나는 분들에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한참을 설명해야 했는데, 그때에 비하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좀 난감하다. 어릴 때부터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연마하거나 훈련해야 할 기술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글을 잘 쓰기 위해 나름대로 익힌 훈련법이 있긴 하다. 그것이 작법서 등에 나와 있는 공신력 있는 방법이 아니고 어찌 보면 너무 개인적인 방법이어서 문제이긴 하지만…….

방송글만의 특징을 얘기할 때, 많은 작법서에서 문어체와 구어체의 차이를 들어 그 특성을 설명한다. 즉, 방송작가는 ‘글을 쓰듯이’가 아니라 ‘말을 하듯이’ 대본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대본은 읽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 위해 즉 듣는 사람을 위해 쓰인 글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문체는 간결하게, 어휘는 쉽게, 단어는 명확하게 쓰라는 조언을 한다. 모두 옳은 말이다.

그런데 나는 방송작가 생활을 하면서 이런 내용들이 어딘가 조금 아쉬웠다. 다 맞는 얘기인데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어떻게 연습하면 좋은지 보다 손에 잡히는 조언을 해주면 좋을 듯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방송글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고 방송작가 생활을 하며 틈틈이 이에 맞는 훈련법을 실천해 보았다. 조금은 엉뚱해 보일 수 있지만, 내게는 꽤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훈련법은 글에 리듬감을 싣는 것이다.


나는 방송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늘 시집을 선물한다. 후배나 제자들은 내가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면 한껏 기대했다가 얇은 시집을 내미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곤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이 손사래를 치는 일을 시킨다. 바로, 시낭송이다. 집에 돌아가면 선물한 시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 반드시 낭송해볼 것! 물론 내 선물과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거란 확신으로 지금도 시집 선물하기를 계속하고 있다.

시는 리듬이 있는 글이다.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말의 가락, 즉 운율 때문이다. 시에서는 이 운율을 사용해 리듬감을 살리고 읽는 이로 하여금 시인이 강조하고 싶은 내용에 주목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시는 낭송을 했을 때 비로소 그 어휘들의 아름다움과 시인의 감성이 보다 잘 전달된다. 그런데 방송글도 그렇다. 라디오를 듣거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작가가 쓴 글을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다. 자막으로 다시 화면에 새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소리로 공중에 흩어진다.


따라서 방송글도 낭송을 위한 글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내가 체득한 제일 좋은 방법은 시처럼, 방송글에 운율을 주는 것이다. 운율을 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주로 활용한 것은 일정한 글자 수를 반복하거나,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주제를 강조하는 방법이었다. 내가 쓴 글에 리듬을 줘야겠다고 자각하고 대본을 쓴 이후 가장 달라진 점은 방송 중 내 글을 읽는 MC나 DJ, 내레이터들의 실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이다. 리듬을 가진 글은 듣기에도, 읽기에도 편하기 때문이다.

방송글을 잘 쓰기 위해 내가 실천한 두 번째 훈련법은 만화 보기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울신문>에 ‘대추씨’라는 4컷 만화가 있었다. 서사구조를 설명하는 강의에서 나는 이 만화를 비롯한 4컷 만화를 자주 인용한다. 그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3장 구조’나 ‘기승전결’의 구조를 이해시키는 데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기 때문이다. 4컷 만화에는 작가가 전하고 싶은 말을  축약해서 표현하는 간결 미과 마지막에 강렬한 메시지를 던지는 반전미까지  담겨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화는 이미지와 스토리가 융합을 이루는 매체다. 그런데 좋은 만화가들은 그 융합을 절묘하게 이루어내서,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풍선이나 지문에서 다시 표현하지 않는다. 그림은 그림대로, 글은 글대로 각자 메시지 전달자 역할을 한다.

나는 방송글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가끔 초보 작가들이 쓴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영상으로 이미 다 표현되는 이야기를 내레이션으로 반복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영상으로 주인공이 밤길을 걷는 모습이 보이는데, 여기에 내레이션으로 “밤늦게 OOO 씨가 길을 걷고 있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내레이션에서는 주인공이 왜 밤길을 나섰는지 정보를 주거나, 밤길을 혼자 걷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메시지를 전달해줘야 한다.

따라서 방송작가는 만화가처럼 그림을 잘 그릴 필요는 없지만, 그림을 읽는 눈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화책도 좋고, 그림책도 좋고, 화가들의 멋진 작품도 좋다. 이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어야 비디오와 오디오가 조화를 이루었을 때, 또는 두 개의 다른 영역이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할 때의 짜릿함을 맛볼 수 있다.

방송 글을 위한 훈련법 세 번째는 여백 주기이다.


간혹, 보도국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때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다큐멘터리를 처음 제작하는 기자들의 경우, 원고를 쓴 후 원고에 맞추어 영상을 편집하자고 한다. 평소 기사를 먼저 쓰고 영상을 준비하는 식으로 뉴스 꼭지를 만들던 습관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영상의 길이와 내레이션의 길이가 정확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가진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의 경우, 더빙을 위해 원고를 내레이터에게 줬을 때는 백이면 백, NG를 연발한다. 읽는 사람에게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상을 빈틈없이 말로 채운 방송은 결국, 시청자들에게도 숨 가쁨과 답답함을 느끼게 만든다.

내가 취재한 내용, 내가 모은 정보들을 방송에 전부 다 쏟아부으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때론 말하지 않는 침묵이 더 강한 메시지일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한 편의 프로그램 중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에선 방송글들을 최대한 들어낸다. 그리고 시청자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공감할 시간을 주려한다. 시청자들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똑똑하고 지혜롭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이 방송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착각으로 너무 상세히 설명하려고 들지 말자. 그리고 MC, DJ, 혹은 내레이터가 쉼표와 마침표까지 표현할 공간을 주도록 하자.


안타깝게도 미디어 비평 특강에서 만난 학부모에게 이 이야기들을 다 전하지 못했다. 당황하기도 했고 시간도 부족했다.  누군가 또다시 방송글을 잘 쓰기 위해 평소 실천하는 훈련법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젠 다음처럼 요약해서 얘기할 것이다.

시를 읽으며 언어에 실린 리듬감을 직접 느끼고, 만화나 그림을 보며 문자와 더불어 이미지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며, 말하는 것만큼 말하여지지 않는 것, 그리고 짧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내가 전하는 '방송을 위한 글쓰기 훈련법'은 그 어느 작법서에도 나와 있지 않는 나만의 방법이다. 따라서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만, 방송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런 연습 방식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에 정답은 없고, 가장 좋은 훈련법이란 결국 내가 즐겁고,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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