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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Jan 02. 2018

선배의 능력을 내 것으로 만드는 ​대본 필사

베껴쓰기로 나의 문체를 찾자!


누군가 내게 물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냐고.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구멍가게를 하던 우리 집 2층에 새로 웅변학원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으로 늘 혼자 놀던 아이였지만 수업 시간이 되면 신기하게도 일어나서 책을 읽거나 발표하기를 좋아했다. 또박또박 책을 읽거나 발표를 곧잘 하는 나를 보고 담임 선생님은 "주미는 커서 아나운서 하면 잘 하겠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엄마는 친구가 없던 내게 친구도 만들어주고 발표 능력도 키워줄 겸 웅변학원에 보내셨다. 그런데 웅변학원을 다니다 보니 선생님이 주신 원고들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나 긴 문장으로 구성된 웅변 원고가 잘 외워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불조심'에 관한 웅변대회를 준비하면서 당돌하게 내가 직접 원고를 쓰겠다고 선언했다. 어차피 수상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선생님은 그러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의 첫 작품이 탄생했다. 어린이들이 집에서 장난을 치다 화재가 났고 그 불을 끄다는 소방관 아저씨가 희생됐다는 TV 뉴스를 보고 그 상황에 감정이입을 해서 원고를 완성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웅변대회에서 난 당당하게 2등으로 입상했다. 그때부터 학원에서 유일하게 웅변 원고를 직접 쓰는 학생이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대회에서 상을 탄 원고들을 여러 번 읽었고, 다음으론 원고지에 수상 원고들을 직접 베껴 써봤다. 그리고 수상 원고에 나온 사례들을 주위에서 직접 듣거나 경험한 이야기들로 바꾸기 시작했다. 주장하는 문장을 머리말에 써보기도 하고, 끝부분으로 옮기기도 하면서 청중들의 관심을 놓지 않고 웅변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생각들을 글로 옮기고, 그 글들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순간이 얼마나 기쁜지를 알아버렸다.     

   


최근 주위에서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었다. 글을 잘 쓰려면 꼭 재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재능으로 쓸 수 있는 글은 '시'나 '소설' 같은 극히 일부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방송글이나 논리적인 글, 자소서 등은 연습으로 충분히 잘 쓸 수 있는 분야라고 믿고 있다. 글쓰기 구조를 익히고 자신만의 틀을 만들어 놓으면, 글을 써나가는 데에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글을 쓸 때 주로 질문으로 문단을 열거나, 명언으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구체적인 경험 또는 사례로 글의 물꼬를 튼다. 물론 그렇게 주요 패턴을 정해놓고 글을 쓰다 보면 나중에는 지겨워서 좀 다르게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도 한다. 그럼 또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에 맞는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나만의 틀을 추가하면 된다.  


더불어 추천하는 방법은, 평소 읽었던 텍스트 중에 마음에 드는 문체나 구조를 가진 글쓴이를 한 명 선택하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면 평소 즐겨있는 평론가의 글이나 기자의 글도 좋고 요즘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도 좋다. 이 사람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작가의 작품들을 한동안 집중해서 읽어본다.


그럼 어느새, 그 작가의 문체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흉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른다. 물론 누군가를 흉내내기에 그친다면 영원히 진짜 내 글을 쓰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작은 것이라도 바꾸려는 시도를 해야 한다. 문장 길이를 작가의 글보다 짧게 혹은 길게 써본다든지, 그 작가 글에서는 없는 대화체를 도입한다든지, 작가가 즐겨 쓰는 단어들을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로 교체를 해보는 식으로 작은 것부터 변화를 꾀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나만의 스타일 찾기가 시작된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문학에선 ‘문체’ 즉, 문장에서 느껴지는 필자의 개성이나 특징이라고 한다. 자신만의 문체를 갖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과 연습이 필요하다. 그 인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시켜주는 지름길이 베껴쓰기, 즉 필사가 아닐까?   


사실, 필사(筆寫)는 작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해봤을 정도로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방송 글쓰기에서도 필사가 도움이 될까? 나의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하지만 TV 방송은 영상이 우선시되는 글쓰기인 만큼 단순히 좋은 문장이나 존경하는 작가의 글을 베껴 쓰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20년 전, 내가 실천했던 방송 대본 필사의 세 단계를 공유하고자 한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방송대본의 원고지는 일반 원고지와 그 형식이 다르다. 원고지를 세로 방향으로 반을 나누어 한쪽에는 비디오, 다른 한쪽에는 오디오 부분을 서술한다.  비디오 항목에는 각 장면들을 묘사하고 시간을 체크하여 서술하고 오디오 항목은 내레이션이나 멘트 등을 서술한다. 즉, 방송작가가 쓰는 글은 영상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영상을 살리기 위한 글을 써야 한다.      


방송 대본의 필사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닮고자 하는 선배 작가나 자신이 쓰고 싶은 장르의 방송 중 잘된 작품을 고른다. 그리고 그 방송을 다시 보기로 보면서 오디오는 끄고, 영상의 흐름만을 읽는다. 이후 원고지에 비디오 부분에 들어갈 각 장면들과 장면별 시간을 기록한다. 여기서부터 중요하다. 자신이 그 프로그램의 작가가 됐다고 생각하고 영상의 공간에 채워 넣을 내레이션이나 멘트들을 직접 써본다. 이 과정은 이후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고 선배들이 왜 방송 글쓰기의 고수이며 전문가인지를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이다. 아마 단 몇 초의 영상을 글로 메우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이번에는 앞서 비디오 항목만을 기록한 원고지를 따로 복사하고 오디오 항목에는 실제 방송된 멘트를 따라 써본다. ‘대본 보기’가 제공되는 방송이라 하더라도 되도록 다시 보기를 통해 들리는 대로 써보는 것이 방송글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방송글은 읽기 위한 글이 아니라 듣기 위한 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앞서 써놓은 대본과 선배들이 쓴 대본을 비교하여 어떤 부분이 다른지 분석해본다. 예를 들어, 휴먼 다큐멘터리에서 주인공들이 산책하는 장면에서 나는 그날의 날씨를 서술했는데, 선배 작가는 이 산책이 출연자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서술했다면 그 차이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얻은 것이다.  방에서는 영상을 설명하는 글 구체적인 정보를 주는 글이 좋고, 정보를 주는 글보다는 영상에서 보는 것들의 숨은 가치를 발견하는 글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선배의 대본을 옮겨 놓은 것에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을 찾는다. ‘나라면 이렇게 썼을 텐데’하고 퇴고의 과정을 가져본다는 뜻이다. 가령, 단순하게 주어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글맛이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비슷한 뜻이지만 강약이 다른 어휘를 바꾸어 사용한다든가, 시청자들에게 더 공감을 줄 비유법이나 표현으로 바꾸어본다. 이렇게 퇴고 과정을 거친 후에는 꼭 소리 내어 크게 읽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색한 문장들을 보다 수월하게 솎아낼 수 있다.     


이상이 내가 작가 지망생 시절, 그리고 방송에 입문한 이후에도 글쓰기에 자신이 없을 때마다 행했던 필사(筆寫)의 비법이다. 물론 베껴 쓰기만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표절을 행할 수도 있고, 어떤 선배를 따라 쓰기만 한다며 복제품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베껴 쓰기에 그치지 않고 선배의 장점을 배우면서도 그 글을 비판하는 자세로 접근한다면, 머지않아 자신만의 문체를 가진 창의적인 방송작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화가 피카소도 말했다지 않는가?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라고.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작가 혹은 선배의 글들을 좇으며 내가 왜 이 글에 마음을 뺏겼는지, 이 글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질문을 이어가고 진짜 재능을 가진 이들을 질투하다 보면, 나 역시 누군가가 부러워할만한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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