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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Dec 19. 2017

막내작가들이 프로그램에 미치는 영향

떡잎부터 남다른 스토리텔러들


나는 운이 좋은 구성작가다.

20여 년 전에는 방송계에 구성작가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방송국에 들어오면 곧바로 서브작가나 메인작가로 입봉하기도 했다. 라디오 작가로 일을 시작한 나 역시, 방금 내가 쓴 글이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경험을 남들보다 일찍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 글’을 써서 방송으로 내보낼 기회를 가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방송 현장에서 자료조사, 막내작가, 서브작가, 메인작가 등등 작가의 단계가 세분화되었고 단계별로 수련해야 할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글 좀 쓴다는 소리를 듣고 방송계에 입문하지만 자신의 문장 한 줄 쓸 수 없는 상황에 실망하고 그만두는 후배들이 많다.


노트북을 펼치고 글을 쓰기보다는 기사를 검색하고, 전화를 돌리고, 촬영본을 기록하는 이른바 방송 만들기의 밑작업만을 도맡아 하기 때문이다. 자료조사원 혹은 막내 작가로 불리는 이 고된 시간을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 3년 정도 보내고 나서야 방송 말미에 스치듯 지나가는 '구성:OOO'이란 자막을 새길 수 있다. 그래서 방송가에서는 '6개월이 고비'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다닌다.


방송 일을 시작하고 잡무를 처리하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 글을 써본 게 언제였나 싶고 이 일이 적성에 맞긴 한지 자신할 수 없어 방송가를 떠나고 싶어 진다. 보통 이 위기의 순간은 주기가 있는데, 주로 6개월 단위로 찾아온다. 아마 방송국 시계가 봄 개편과 가을 개편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프로그램의 존폐를 결정짓고 옆 동료가 먼저 입봉 하는 순간을 지켜봐야 할 시기마다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 그렇게 6개월마다 찾아오는 고비를 잘 넘겨, 막내이지만 '작가'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되고 자신의 꼭지 하나를 맡게 되면 짧은 분량이지만 나의 기획, 나의 원고가 방송을 매개로 세상에 나간다는 뿌듯함으로 버틸 수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비록 자료조사원이나 막내작가라는 인고의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많은 후배들을 만나면서 내가 깨달은 바가 있다. 좋은 구성작가 재목은 자료조사 작업부터 남다르다는 것이다. 재빨리 정보를 찾고 선배들이 시키는 일만 충실히 하면 될 것 같은 팀의 막내들이기에, 업무를 맡기면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이들에게도 이른바 '한 끗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 지금부터, 떡잎부터 다른 될성부른 작가들의 한 끗 차이에 대해 얘기해 보자.


자료조사원이나 막내작가로 방송 일을 시작하면 그들에게 주어지는 임무는 크게 세 가지다.

먼저, 아이디어 회의에 참가해야 한다. 매주 혹은 매일 방송되는 프로그램의 경우, 아이템이나 출연자를 선정하는 아이디어 회의는 프로그램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과정이다. 시청자가 흥미나 호기심을 가질만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놓고 제작진 간 설전이 오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에 막내 스태프들에게 발언의 기회가 돌아갈까 하겠지만, 사실 자료조사원이나 막내 작가들이 가능성을 인정받을 절호의 기회가 이 순간이다.

자신이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선배 작가나 PD들이 아이디어를 낼 때 망설임 없이 질문을 던지거나 딴죽을 걸어야 한다. 사실, 방송 베테랑들은 이미 방송을 보는 시각이 구조화되어 있어서 실패가 적거나 성공을 보장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기가 쉽다. 이때 도발적인 질문과 의견을 내놓는 역할을 막내 스태프들이 해야 한다. 막내들은 시청자의 입장에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젊고, 가장 창의적인 시각을 가진 예비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잘 되는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디어 회의 분위기부터 다르다. 막내들은 “왜요?”라는 질문으로 끊임없이 선배들을 도발하고, 날카롭게 반대 의견을 던진다. 선배들은 그런 후배들을 나무라기보다 경청하고 격려한다. 그 과정 속에서 보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틀이 갖춰진다. 그 방송이 얼마나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가가 자료조사원과 막내 스태프들의 입에 달렸다.

아이템이 정해지면 자료조사원은 다음 작업인 정보검색에 들어간다. 그 주제에 관해 세상의 모든 정보를 모은다는 마음가짐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도 떡잎부터 다른 자료조사원들은 남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영특한 자료조사원은 사진 한 장도 허투루 선택하지 않는다. 통계치 하나를 찾을 때도 출처를 꼼꼼히 기록한다. 종종 잘못된 사진을 쓰거나 편파적인 통계를 사용해서 비난 받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이는 아마 자료조사원이 실수를 했고, 이 실수를 메인작가나 PD들이 미처 확인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TV 프로그램 자료조사원이 된다면 ‘오랜 날, 오랜 밤’을 모니터 앞에 앉아있어야 한다. 제작진이 촬영해 온 영상 중에서 쓸 만한 화면들을 ‘서치 search’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템을 정하고 자료조사를 해서 본격 촬영에 들어가면, 자료조사원의 업무는 더 많아진다. 매일 촬영해 온 영상들이 산처럼 쌓이기 전에, 어떤 장면들이 찍혔고 어떤 인터뷰들이 담겼는지 일일이 기록하는 고단한 작업을 맡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선배 작가들은 매의 눈으로 후배들의 영상 스토리텔링 감각을 눈치챌 수 있다. 감각 있는 자료조사원은 한 프로그램 안에서 나눈 시퀀스(이야기 단위)를 파악하여 어떤 장면, 어떤 인터뷰가 중요한지 찾아 밑줄을 그어놓거나 메모를 남긴다. 그리고 단순하게 장면을 묘사하기보다, 그 장면이 가진 의미까지 파악할 수 있게 서술한다.

예를 들어, 촬영한 화면을 보고 ‘걸어가는 주인공 부부의 뒷모습’으로 기록할 수도 있지만, ‘한 걸음씩 앞서가는 남편과 다리를 절며 바삐 따라가는 아내’라고 묘사한다면 영상이 주는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영상을 읽는 감각이 탁월한 자료조사원과 일하는 선배 작가와 PD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될성부른 구성작가는 ‘서치’작업에서도 남다른 눈을 가졌다.


떡잎부터 달랐던 자료조사원들 중 유독 기억에 남는 후배가 있다. 내가 내는 아이디어마다 “그거 재미없는 것 같은데요”, “다른 방송에서 본 것 같은데요”를 연발하던 그녀가 얄밉기도 했지만 통통 튀는 그녀의 시각 덕분에 아이디어 회의는 언제나 즐거웠고, 찬반 쟁점이 있는 아이템을 다룰 때면 결과가 상반되는 통계치를 찾아와 보다 논리적인 방송이 가능하게 했으며, 영상을 읽는 눈이 예사롭지 않아 우리 팀의 편집 작업을 한결 수월하게 해주었다.


그녀와 2년 가까이 부산에서 시사프로그램을 함께 만들며 조금씩 성장하는 후배의 모습을 보는 것이 뿌듯했다. 하지만, 내 품 안에 가두기에는 그녀의 재능이 아까웠다. 선배로서 서울행을 권유했고 지금 그녀는 서울에서 잘 나가는 메인작가로 일하고 있다.

결국 나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장차 보석이 될 원석을 발견하는 과정, 바로 자료조사원과 막내작가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운이 없는 작가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단하더라도 자료조사원과 막내작가 시절을 거쳤다면 더 오래, 더 빛나는 방송작가로 남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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