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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Mar 13. 2018

최고 MC와의 악연 극복기

작가와 진행자의 궁합


전직 방송작가였다고 하면, 처음 본 사람들이 건네는 단골 질문들이 있다.

“연예인 누구랑 일해봤어요?”
“친한 연예인 없어요?”
“누가 제일 잘생겼어요?” 등등.

주로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연예인하고 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들의 흥미는 곧 시들해지고 만다. 그러나 내게도 쇼·오락프로그램을 구성할 기회가 일 년에 몇 번씩은 있었다.


행사가 많은 부산에서 오랫동안 일한 덕분에, 영화제나 아시안게임,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특집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역에서 제작하지만 방영은 전국으로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유명 가수들은 물론이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진행자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쇼·오락프로그램을 스토리텔링할 때는 진행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번에는 누구에게 진행을 맡길 것인지를 두고 장시간 회의를 거듭했다.


쇼프로그램 MC는 그 방송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시청자들이 가장 오랫동안 만나야할 사람이고,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출연자와 무대들을 이질감 없이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쇼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전체 방송의 완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즉, 쇼·오락프로그램에서 진행자는 핵심 스토리텔러인 셈이다.

제작진이 기획한 프로그램에 딱 맞는 진행자를 찾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진행자가 있어도 스케줄이나 출연료가 맞지 않아 제의를 거절하기 일쑤였고, 어렵게 출연이 결정되어도 녹화 당일까지 이런저런 변수들이 등장해 출연이 불발되기도 했다. 혹은 특정 진행자를 무난히 섭외하고 녹화를 시작했지만 프로그램 성격과 진행자의 스타일이 맞지 않아서 현장에서 “이게 아닌데!”라는 탄식을 삼켜야했던 적도 여러 번이다.

이렇게 몇 차례의 경험이 쌓이면서 내게도 마음 속 ‘최악의 진행자’와 ‘최고의 진행자’가 나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최악의 진행자와 최고의 진행자의 차이가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이란 것이다.


다음 소개하는 일화가 그런 사례가 되겠다.

한번은 부산에서 열리는 가장 큰 지역축제의 축하쇼를 맡게 되었다. 다행히 제작비가 적지 않은 편이어서 원하는 MC를 섭외할 수 있었다. 당시 인기 있는 가수들도 무난히 출연을 승낙하여 쇼 준비는 순풍에 돛 단 듯이 순조로웠다. 그런데 이렇게 별 노력 없이 일이 잘 풀릴 때, 우리는 ‘방심’이란 것을 하고 만다.

보통 쇼프로그램을 준비할 때 녹화에 앞서, MC들을 미리 만나 쇼 성격도 설명해주고 진행 시 주의점도 일러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진행자는 워낙 베테랑 MC였고 그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여 이메일로 방송원고와 큐시트를 미리 보내는 것으로 사전 미팅을 대신하기로 했다. 거기서 부터가 나의 실수였다. 그가 녹화당일까지 이메일을 읽지 않은 것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는 평소 ‘의전’에 굉장히 민감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대본에 얽매인 진행을 싫어해서 원고에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써야 하며, 글자는 최대한의 크기로 써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송작가로서 나는 MC의 장단점과 개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사건은 녹화 당일 터졌다. 의전을 중요시하는 그가, 비행기를 타고 갈 것이라고 미리 알려줬건만 방송국 차량을 배정하지 않아서 손수 택시를 잡아타고 행사장까지 오게 만들었다. 이미 그의 심기는 불편할 대로 불편해져 있었다. 무대가 축제 현장에 위치한 야외였기에 천막으로 만든 대기실을 썼는데, 제작진은 MC만의 독립공간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고 출연 가수들과 천을 사이에 두고 같은 공간에서 대기해야 했다. 내가 원고를 전하러 갔을 때 그의 표정은 이미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다른 MC들에게도 주던 형식과 내용으로 쓴 원고를 보여주었지만, 그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그리고 곧 내 인생 최고의 모욕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장면이 이어졌다. 그가 나의 원고를 던져 버렸다!

“뭐 이따위 원고가 있어! 나보고 진행을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라고 외치면서.

원고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내팽개치는 그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를 알길 없었던 나 역시, 어이가 없고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그 날 나는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느라 방송에 전념할 수 없었고, 그는 원고 대신 큐시트에 적힌 가수와 곡명만 보고 진행을 했다. 녹화 후 PD와 편집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제작비를 가지고 이렇게 재미없는 쇼를 만들다니!”라는 반성으로 괴로움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 일화가 여기서 끝맺는다면, 나는 정말 능력 없는 쇼·오락 작가로 남을 것이고, 그 베테랑 MC는 인성이 바닥인 진행자로 남을 것이다. 인생사가 재미있는 것은 바로, 반전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후, 그는 내 인생 최악의 진행자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진행자가 되었다.

이듬해 우리는 다시 똑같은 쇼를 준비하게 되었다. PD는 다른 진행자를 찾자고 했지만 나는 오기가 생겼다. 이번에는 반드시 원고를 읽게 만들겠다는 오기 말이다. 자진해서 서울 출장을 갔다. 제일 먼저, 지난해 준비가 미흡했음을 사과하고, 혹시 원고를 쓸 때 참고할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자신은 흥이 나야 쇼 진행을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며, 그러려면 원고를 따라 가기보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애드립을 치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또한 노안이 와서 원고를 읽기가 힘들다는 고백도 해주었다.

부산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그가 진행했던 프로들을 찾아봤다. 무의식 중에 많이 쓰는 말버릇은 무엇인지, 어떤 자세로 멘트할 때 제일 편해하는지, 진행 스타일의 특징이 무엇인지 등을 공부했다. 그가 혼자일 때보다 자신의 애드립을 받아주는 여성 MC가 함께 있을 때 훨씬 안정감 있는 진행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원고는 그가 평소 많이 쓰는 단어들을 배치해서 작성했으며, 한 곳에 서있기 보다 무대를 움직일 때 훨씬 자연스러운 진행을 한다는 특징을 찾고 출연자들과 무대 중앙에서 이야기할 기회를 늘였다.

‘MC OOO'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그가 의전에 민감했던 이유가 녹화를 하는 순간 에너지를 쏟기 위한 그만의 노하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녹화 당일, 제작진은 방송국 차량을 공항으로 보냈고 MC를 위한 독립 공간을 간이로 만들어 진행 전, 차분히 방송에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해 지역축제 축하쇼는 한마디로 대성공이었다. 흥이 난 MC가 신명나는 진행으로 출연자는 물론이고, 현장에 있는 관객들과 함께 웃고 춤추며 생동감 있는 쇼를 완성했다.

방송가에는 속된 표현으로 “작가가 개떡같이 써도 찰떡같이 읽는 사람이 명MC"라는 말이 있다. 내 경우로 본다면,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최고의 진행자, 최악의 진행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진행자라 불리는 사람들도 속내를 들여다보면, 같이 일해서 시너지를 발휘하는 제작진이나 파트너들이 늘 곁에 있다. 그 제작진들은 진행자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도록 시공간 상황을 연출할 줄 안다. 특히 방송작가들은 그 누구도 아닌 그만의 원고를 만들기 위해, 그의 말투와 행동, 성격을 연구한다. ‘MC OOO학’의 박사인 셈이다.

결국 쇼·오락프로그램의 성공은,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스토리텔러인 MC, 그리고 카메라 뒤 숨은 스토리텔러인 방송작가의 궁합이 맞았을 때 비로소 이뤄낼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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