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죽는다면 어떤 빵을 먹고 싶은가
재작년 11월 갑상선암 판정을 받았다. 작년 2월 세브란스 수술실에 들어갔다. 대체로 씩씩했지만, 그때의 그 실려가는 느낌을 잊을 수는 없다. 초기이고 전이도 없는 간단한 반절제 수술이었지만, 전신마취를 한다. 못 깨어날 수도 있다. 죽. 을. 수. 도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그날 무엇이 먹고 싶었나? 금식을 해야 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뭐가 먹고 싶진 않았다. 만약 또 그런 경험을 해야 한다면 무엇이 먹고 싶을까? 여전히 떠오르는 음식은 없다. 다만, 우리가 정말 행복했던 순간들이 솜사탕처럼 뭉쳐진다. 우리가 자주 가던 그 빵집에서의 소소한 추억들. 고소한 빵과 신선한 커피 향, 잔잔한 음악에 섞여 흐르던 우리의 대화들.
처음 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얼음이 되었다. 손에 무언가 들고 있었는데, 힘이 쭉 빠져 놓쳤버렸다. 휴대폰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회사에 전화해 오후 방송을 못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리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아무 걱정 말고 빨리 검사받고 수술일 잡으라고 하셨지만, 오늘 당장 방송을 빼야 하는 상황이 내키지가 않았다. 그런 상황에 화가 났다. 내가 미웠다. 일 구까지께 뭐라고.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었다. 내가 왜? 어쩌다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거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들었다. 답도 없는 답을 찾아 허우적댔다. 별 거 아니라는 말. 흔하다는 말. 괜찮을 거라는 말. 힘내라는 말. 그 어떤 말에도 사실 괜찮지 않았다. 힘이 나지도 않았다. 어둡고 차가운 바닥에 가라앉는 나를 건져 올린 건, 나보다 먼저 유방암을 겪었던 친구의 한 마디였다.
"그냥 사고야."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 내가 잘못 살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 내가 어떻게 해도 막을 수 없었다는 말.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그래,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 지나간 ’왜’를 붙들고 있어 봤자 뭐 하겠어. ‘사고'로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한 번씩 근심 파도가 밀려와도, 유유히 드러누워 안전한 뭍까지 헤엄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어두운 물살에 빠져드는 귀한 내 시간들을 건져 햇볕에 말렸다. 내일 죽는다면 어떻게 오늘을 살고 싶은지. 매일 아침 차분히 생각해 보았다. 돈, 교육, 권력, 인기. 모든 야망이 단 한 문장으로 모아졌다.
하루하루 무탈하게
수술 후 긴 회복기를 가졌다. 연차를 다 쓰고, 병가를 내고, 첫째 때 쓰지 않았던 육아휴직 막차(초3 생일 전이었다)를 탔다. 언제 또 이렇게 놀 수 있겠어? 어쩌면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일 지도 몰라. 로봇수술을 했던 겨드랑이 부위 통증과 목소리의 회복은 더뎠지만,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아서 당장 죽을 것처럼 놀았다. 매일매일 여행하듯 사랑하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강원도 홍천. 농막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 체크인-체크아웃 시간제한 없는 내 땅이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서울-양양 고속도로는 차가 많이 막히는 편이라, 이른 새벽부터 출발할 때가 많았는데, 홍천 IC를 나와 주말농장으로 가는 길에 유명한 빵집이 하나 있었다. 부지런한 사장님이 새벽부터 맛있는 빵을 한가득 구워 환대해 주셨다. 매주 우리 가족의 든든한 아침이 되었다. 빵도 맛있고, 커피도 맛있고, 뛰어놀 수 작은 마당도 있고, 함께 뛰어주는 개도 있고. 홍천집만큼이나 우리는 홍천빵집을 사랑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도 들러 카페인을 채우고, 빵을 포장해가기도 했었는데, 어느 날부터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사모님의 갑작스런 병환으로 당분간 문을 열 수 없다고 한다. 매일 오전 7시부터 따뜻한 음악과 책을 공유해 주시던, 커피도 무료로 리필해 주시던 진심이 그립다. 언제 가도 환한 지붕 두 개, 화장실마저 예뻤던 그 집이 정말 그립다. 사모님의 사고도 부디 아주 작은 사고이기를. 따뜻한 봄이 오면, 우리들의 소금빵을 다시 맛볼 수 있기를. 나의 담백한 바램을 구워 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