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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살인자에게 '찌질한 죄책감'을 포장한 게 불편한 영화

by 살라

영화 <어쩔 수가 없다> 리뷰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인간의 추악한 내면과 현대 사회에서 가장의 자리, 실직의 공포, 그리고 그 공포가 인간의 도덕성을 얼마나 훼손하는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사실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지만, 역시 박찬욱 감독의 영화답게 보는 내내 불쾌함과 불편함이 관객을 지배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한 감정이야말로 감독의 능력이자 이 작품의 힘으로 느껴진다.

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잔혹함을 동시에 드러낸다. 주인공(이병헌)은 실직 후 가족의 평화로운 삶을 지키려 몸부림치지만, 결국에는 붕괴가 예고된 가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자폐 성향의 딸, 재취업 과정에서 만나는 AI 기계, 살인을 통해 일자리를 차지하는 모습 등은 모두 한국적 정서를 메타포로 극단화한 장치다. (사실 시대에 질문하려는 의도를 가진 한국 영화에서 자폐성향의 자녀는 자주 등장하는 데 그것도 식상하고 불편하다.)

특히 '가장'의 존재감이 직장의 직함으로 대체된 현실에서, 해고당한 개인이 느끼는 공포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나 몰입이 쉽지는 않다. 요즘 30~40대 가장은 이미 평생직장 개념을 버리고 사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직과 투잡, 창업, 콘텐츠 크리에이터 등 다양한 방식으로 퇴사 이후의 삶을 준비한다. 감독이 20년 전부터 준비한 시나리오라지만, 지금의 시대 정서와는 간극이 크다.

실직한 남편들에게 아내들은 "당신은 너무 열심히 살았어. 왜 그랬어?", "실직이 싫은 게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태도가 싫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이병헌은 고졸로 공장에 취업해 다니다 통신대를 졸업한다. 학력 콤플렉스를 채우려 했지만, 여전히 자신을 부족하게 느낀다. 조리 있게 말하기 어려워 손바닥에 할 말을 메모한 채 힐끗 보며 대화하는 장면은 불편할 정도로 처절하다.
하지만 지금은 평생교육 시대다. 학벌에 결핍을 느껴 통신대를 다니는 40대 가장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오늘날의 통신대 졸업생들은 취·창업에 필요한 학습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자존감 높은 세대다.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과 '어쩔 수 없다'라는 자기 합리화의 주문은, 결국 사회 전체에 던지는 냉정한 질문이다. 그러나 세대적 공감은 여전히 어렵다. 영화는 사회적 살인과 개인의 살인을 한 선상에 올려놓고, 그 불편한 경계에 관객을 세워둔다.
하지만 '가장'의 모습에 쉽게 감정이입하기는 어렵다. 지금의 40대라면 SNS와 정보에 민감하고, 재취업과 창업, 부업을 고민하며 실직 이후의 삶을 대비하는 세대다.

그런데 영화 속 그는 지나치게 '찌질한'모습으로 묘사된다. 일자리를 대체할 AI와 해고, 가족 해체, 인간 존엄의 붕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정작 주인공은 과거의 '패배한 가장' 전형으로 그려진다. 손바닥에 메모를 쓰며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는 가장 — 이는 80~90년대 가장의 모습일 수 있을까? 아무튼 현재의 40대는 아니다.

결국 영화는 '정말 어쩔 수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극도의 불쾌함과 몰입이 어려운 전개 속에서도, 일자리 경쟁과 인간의 존엄, 사회 구조의 폭력을 한 선상에서 논의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남는다.

결말은 씁쓸하고 찝찝하다. 위선과 자기 합리화, 사회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성공했다. 그러나 살인자에게 '찌질한 죄책감'을 포장하지 말라.

가장이라고 해서, 겁 많고 죄책감을 가졌다고 해서 살인이 악이 아닌 건 아니다. 이번만큼은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선을 비추는 데 실패했다.
이병헌의 모습에서는 루쉰의 [아Q정전]이 떠오른다.
자기 합리화와 정신승리의 초라한 얼굴이.


사진 이미지 출처는 cgv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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