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는 기다림의 맛이다.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는 시간, 깊이 우러나오는 향을 기다리는 순간. 그 기다림의 끝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음료.
뱅쇼를 끓이는 동안 나는 시간을 끓인다.
조용히 바글바글 끓는 냄비 속에서 추억이 끓는다.
뱅쇼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면, 그 모든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
붉은 포도주의 색이 아니라 붉게 물들었던 내 젊은 날의 감정들이 혀끝을 적신다.
눈발이 흩날리던 겨울 거리에서, 저마다 하얀 숨결을 내뱉으며 눈덩이를 던지며 도망가는 친구들의 웃음소리. 고단한 하루 끝에 불어오는 찬바람 속에서도 따스한 김치찌개 냄새.
스치듯 지나가던 거리의 음악, 추위 속에서 마주 잡았던 손의 온기, 언제나 일탈을 꿈꾸며 "오늘 클럽?"이라고 말하는 여고친구들의 싱싱한 눈빛.
마치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그리움 같다. 가슴을 따끔하게 아리게 하면서도 이상하게 포근하다. 숟가락으로 한 번 휘젓고 나면, 컵 안의 과일 조각들이 떠오르듯 추억들이 나타난다.
'어린 시절 엄마가 만들어주던 감기약처럼'이라는 추억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줄 생각에, 추억을 미리 만들고 있다.
나는 그런 추억이 없었으니,
그래서 뱅쇼는
달콤 쌉싸름한 맛이다. 달콤이 쌉싸름을 다독이는 맛이라 더욱 좋다.
겨울밤이 깊어갈수록 뱅쇼 잔을 감싸 쥔 손끝이 녹아내리고, 그 온기는 곧 마음을 적신다.
얼어붙은 영혼을 포근히 감싸주는 담요처럼 덮어주고 지나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 뱅쇼 한 잔을 끓이러 간다. 기다림 속에 피어나는 이야기를, 잔잔한 위로를, 한 모금에 담아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