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와 한강 작가의 '침묵'으로 본 존재
어린 시절, 저는 이 명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거지. 생각한다고 해서 존재하는 것인가?” 당시 저는 단순히 육체적 존재만을 생각했었죠. 그 후로 자주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습니다.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이란 '의심'이며, 그의 많은 글에서 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감각을, 수학을, 심지어 신까지도 의심했습니다. 그는 의심하지 않은 유일한 것은 ‘의심하는 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존재의 개념은 그렇게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요즘 저는 데카르트의 존재에 대한 명제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니, 존재하나 생각(의심)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생물학적 존재와 의식적 존재를 구분할 수 있었고, 생물학적 존재는 동물이나 식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느꼈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점차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질문하며,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고를 해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되죠. 이 노력 자체가 바로 ‘존재 상태’일 것입니다. 만일 제가 언제라도 생각(의심)을 멈춘다면, 저는 ‘부존재’의 상태가 되는 것.
작가는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갖는 것이 처음엔 망설여졌다고 하죠. 자녀가 세상의 잔혹함과 인생의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것이 이기적인 선택은 아닐까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여름엔 수박이 달고, 봄엔 참외가 달고, 목이 마를 땐 물이 달다. 그런 맛을 아이에게 모두 경험하게 해주고 싶지 않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남편은 아이에게 빗소리를 들려주고 눈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작가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이후 작가 본인의 생각에 균열이 시작되었다고 밝혔죠. 아이와 삶의 작은 기쁨들을 공유하고 싶은 남편의 바람이 그녀에게도 통한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존재’와 ‘부존재’를 구분해서 생각했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것은 아직 ‘부존재’이지만, 우리의 희망을 통해 그것을 ‘존재’로 만들려 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이기심이자 오만이 아닐까요?
우리가 존재하게 만들 때, 그 '존재'가 정말로 존재하기를 원했는지는 모르는 상태인데. 그 엄청난, 우주와도 같은 '존재'를 그저 우리의 희망이나 욕구로 만들어내는 게 과연 옳은 걸까?
또한, 우리는 그 존재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잖아요. 그 존재를 계속해서 희망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어요. 이건 정말 무거운 책임입니다. 아주 좋은 환경에서 키워서 홀로 독립할 수 있게 키워내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중간에 어떤 불가항력으로 엄청난 불행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취약함이 기본값인 채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시키기로 결정'한다는 건지. 갑자기 매우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단지 우리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게 하려는 건 존재의 무게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이미 '부존재'인 상태이기에 섣불리 희망적으로 순수하게 보는 걸까. 판도라의 마지막 ‘희망’을 열어 불행을 모두 쏟아내어 감당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습니다.
생각하는 존재로 키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는 저로서는 그 '존재'의 의미가 너무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려면 내 삶에 책임도 지고, 부조리에 대해 의심도 하고 질문도 하고, 사회와 이웃에 공감과 연대도 해야 진정한 '존재'가 되잖아요. 그런데 나부터도 아직 '진정한 존재'가 되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내가 새로운 생명을 존재케 했다는 건 나의 무지에서 출발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압니다. 그 오만한 이기심의 대가를 치르면서 살아간다는 것을요.
반면, 그 존재는 저의 존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있음도 압니다.
그래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에너지를 만들어 주고 있음도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