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결제의 마법_소비를 불편하게 만드는 신용카드의 체크카드화
내 입맛에 딱 맞는 가계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소비항목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내가 소비하는 개별 항목의 금액은 그다지 크지 않다. 대부분이 만원에서 2만원 안팎이며 어쩌다 가끔 5만원을 넘는 지출을 하게 되면 무이자할부를 활용했다. 금액이 작은대신 항목이 많았다. 그래서 계속해서 소비하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남들처럼 명품가방을 사는 것도 아니고 비싼 옷이나 신발을 사는것도 아닌데? 라며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그러다 작년 1월 한달 총 지출이 500만원에 가깝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되었고 지출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고정비나 연간비 등을 제외하고남은 금액만 해도 270만원. 바로 그 다음달에는 100만원으로 살아보겠다고 다짐하고 가계부를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예산이라는 것을 세워보았고 그 안에서 살고자 노력했다. 현금 여력이 없어 매달 모자란 생활비는 그간 가입해두었던 자잘자잘한 풍차적금, 풍차예금들의 힘을 빌렸었기에 생활비통장에 체크카드를 연결해놓고 잔고 내에서만 소비하는 생활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은, 현금 여력도 연간비도 모두 마련되어 있지만 생활비카드에 체크카드를 연결하는 대신 신용카드로 지출하고 생활비통장에서 해당 금액을 이체해 바로 선결제 하고 있다. 조금 번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매번 나의 소비금액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 이러한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한 달 기준일인 25일이 되면 생활비통장 계좌로 그 달의 변동생활비를 입금시킨다. 그리고 각각의 소비 항목은 대부분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신용카드 결제가 이루어지면 전표매입이 완료될때까지 보통 2-3영업일이 소요된다. 때문에 바로 선결제 하기 보다는 주에 1회 정도 몰아서 선결제를 하는 편이다. 이렇게 해 두면 생활비통장이 또 하나의 기록이 되기도 한다. 가계부를 열어 확인할 시간이 없이 바쁠 때는 바로 생활비통장에 들어가서 키워드로 검색해본다.
한 달 살이가 끝나는 24일에는 생활비 잔액을 대출계좌로 옮겨서 상환하고, 생활비통장은 제로베이스를 맞춘다. 매번 선결제를 했기 때문에 결제일이 다가와도 과거 할부결제했던 일부 금액을 제외하면 고지금액도 없다. 그럼에도 미리 선결제를 했기 때문에 신용카드 사용 실적에 대한 혜택은 챙길 수 있다. 일반적으로 체크카드보다는 신용카드의 혜택이 좋기 때문에 이 방법을 사용한다.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 혹은 현금 생활비를 쓸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정해진 금액 안에서만 소비가 가능하다는 절제의 바운더리 때문이다. 이제 스스로 생각해보자. '계좌잔고'라는 실질적인 바운더리가 존재해야만 지출통제가 가능한지, 아니면 신용카드를 자체적으로 체크카드화 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는지 말이다. 후자에 해당한다고 자신있게 외칠 수 없다면 이 방법은 추천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결국 조삼모사가 아니냐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갚아야 할 카드대금을 결제일 전에 미리 갚는다고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부 카드의 경우 선결제 혜택이 있기도 함) 그럼에도 선결제를 해 가며 내가 설정해 놓은 예산 안에서 소비하며 잔액을 매번 눈으로 확인하다보면 지출이 조금은 어려워진다. 195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신용카드는 시대를 거듭할 수록 편리함을 추구하며 진화해왔다. 이 편리함은 곧바로 지출로 연결된다. 새로운 디케이드가 시작된 2020년, 점차 종이통장도 사라지고 잔돈도 사라지며 실물 플라스틱 신용카드 조차 사라져 휴대폰 간편결제가 대신하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돈을 쓰는게 너무나 편리하다면, 조금 불편하게 만들어서 쓰는것은 어떨까? 절약생활을 지속하다보면 돈 쓰는게 몹시도 힘들고 귀찮아 지는 시기를 분명히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편함이 지출감소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왔음을 알기에 오늘도 불편한 소비를 지향한다.
끝으로 이 글은 신용카드의 순기능을 활용하여 소비습관을 바꾸어 간 나의 사례를 적은 것 뿐, 결코 신용카드 사용을 권장하는 글이 아님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