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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모카 Apr 02. 2020

영화 <대니쉬 걸>

이해되지 않아 더 먹먹한


이해를 다 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적어본다. 아마도  평생  에이나르/릴리(에디 레드메인)를 이해할 순 없을 것이다.


누구도 타인을 다 이해할 순 없지만, 정체성에 대한 건 특히나 더 잘 안된다. 옳고 그르거나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가진 고정관념 때문에 혹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혹시 이런 걸까? 같은 노력으로는 닿을 수 없는 범위의 문제다.


덴마크의 화가 부부인 에이나르와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 무척이나 사이가 좋다. 게르다의 모델이 오지 않아 에이나르가 대신 여장을 하고 모델이 되어주면서 에이나르 속에 내재되어 있던 릴리가 밖으로 나오는 내용이다.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는 남자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번뇌, 성전환 수술을 받으면서 여자가 되는 과정, 사랑하는 남편의 곁에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를 보면서 자꾸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이 떠올랐다. 이 영화 역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뛰어난 수학자인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암호를 풀었지만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강압적인 호르몬 치료를 받다가 자살한다. 그의 곁에 게르다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덜 외롭지 않았을까.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그 누구든. 그런 면에서 에이나르에겐 게르다 있어 참 다행이다 싶다.


게르다가 약을 먹으라고 챙겨주는 등 곁에서 도와주는데

릴리는 자길 돌보지 않아도 된다,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 혼자 해야 한다, 고 말한다.


아, 여기서 나의 고정관념이 또 드러난다. 나 역시 그 곁에 그녀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로 바뀌고 뭔가 불안하고 약해 보였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은 또 어찌할까.. 부인이 그래도 버팀목 혹은 방패가 돼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릴리는 그렇지 않았던 거다. 그저 성이 바뀌었을 뿐 하나의 인격이고 성인이며 홀로 잘 살 수 있다. 그동안 아주 잘해왔었기에. 단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게다가 본인은 바뀐 게 아니라 본연의 모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더욱 바뀐 건 없다.




우린 얼마나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에이나르에게 감정이입을 해보려 해도 잘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방향 조차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렇다면 게르다. 아 이 여인 또한..  허구가 만들어낸 캐릭터라면 모를까, 실화라고 하니 다시금 부인이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게 다. 사랑하는 에이나르를 그리워하는데, 릴리는 에이나르는 없다고 말한다. 차라리 곁에 없다면 모를까. 존재하는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니, 정체성이란 대체 뭘까.


간혹 게르다도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있는데, 정체성으로 힘들어하는 에이나르에게 남자로 살도록 노력해보라고 하다가도, 여장 모델을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자신의 그림 때문일까, 에이나르를 괴로움에서 해방시키기 위함일까. 녀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우린 알 수가 없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더 몰입이 잘 됐을 수도 있다. 표정과 눈빛이 너무 섬세해서 때론 먹먹했다.


그의 선택을 응원한다는 말 대신 존중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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