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뒤를 기약하며.
한동안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이 행복한 삶의 지표라도 되듯이, 인터넷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오르내렸다. 야근 없이 퇴근 후, 가족 혹은 친구들과 맛있는 저녁을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여유 있는 저녁시간.
해가 길어진 여름엔 가벼운 산책(그러기엔 좀 덥나?)을 하거나, 영화나 야구를 보면서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도 있다.
거창하지 않아도 소소한 즐거움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저녁이 있는 삶이다.
반면 전업주부인 나는 저녁 대신 오전이 있는 삶을 누린다. 아들 둘을 제각각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오전 10시가 가까운 시간이다. 가볍게 운동을 하고 돌아와 씻고 나면 11시가 넘는다. 아이들을 보내기 전에 청소와 설거지를 끝내면 좋으련만, 청소까진 무리다. 그러니 운동을 하고 돌아와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다. 그리고 IPTV에서 영화를 보면서 점심을 먹는다. 아, 좋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나면, 초등학생 아들이 오기 전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남는다.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화실에 가는 날엔, 작은 아들을 유치원에 평소보다 약간 빨리 보내고, 오전 10시에 맞춰 화실에 간다. 2시간 동안 슥슥 그리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는다. 이 날도 뭔가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또 다른 날은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의 책 잔뜩과 내 책 1-2권을 빌려 가지고 오면 여유시간이 끝난다.
그리고 중간중간 글도 쓰면서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보낸다. 창문 밖의 일상적인 소음을 듣거나 혹은 음악을 듣기도 하면서.
가끔은 친구와 점심을 먹기도 한다. 전업주부거나 혹은 시간대가 비교적 자유로운 직장인 친구들과. 내가 만든 집밥에 질릴 즘, 친구와 먹는 점심은 수다 이상으로 맛있다. 평소 아이들 때문에 먹지 못한 매운 음식을 먹거나 여유롭게 파스타 같은 것도 먹는다. 그런 후 커피를 마시고 나면, 집에 돌아와야 할 시간에 딱 맞는다.
오후 3시가 넘어가고, 직장인들이 졸음에서 깨어나 퇴근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시계를 보기 시작할 때부터 난 바빠진다.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간식도 챙기고, 저녁도 만들고, 공부를 봐주고, 책도 읽어주고, 씻기고 나면 10시가 넘어간다. 여유로운 저녁 시간보다는 이것저것 움직임이 많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 시간이다. 아이들이 다 자고 11시가 되어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다.
그나마 지금은 11시 이후의 시간을 개인적으로 쓸 수 있지만, 아이들이 어려서 같이 누워 잠을 재울 때는 나도 모르게 잠들기 일쑤였다. 재우고 나와 티비 봐야지, 글 써야지 하다가 1-2시간 자고 나면 12시 넘어서 깨게 된다. 그럼 흘러간 그 시간이 그렇게 아쉬울 수 없다. 다음날은 재우다 잠들지 말아야지, 늘 다짐하지만 그 후에도 자주 반복됐다.
직장인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 하루의 노고를 풀고 그다음 날을 활기차게 보낼 수 있는 힘을 주듯이, 내게는 오전이 있는 삶이 그 날의 육아와 가사를 보다 쉽고 유쾌하게 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런데 아이들이 방학을 하면서 나의 오전 시간은 몽땅 사라졌다. 5살 터울인 두 아들은 잘 놀기도 하지만, 한 번씩 투닥거려서 말려야 한다. “왜 그래? 하지 마.” 그 한마디에 동작 그만 하고, “네, 엄마.”하지는 않으니 “그만해.”언성이 높아진다.
떼어놓으면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언제 싸웠냐는 듯 달라붙어서 냉장고 문을 열어 아이스크림을 꺼내고 주방 서랍에서 과자를 꺼내 나눠먹는다. 그리곤 보란 듯이 우애의 정도가 이쯤이에요, 하듯 여기저기 과자 부스러기를 흘려놓는다. 청소기를 돌린 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다시 청소기를 꺼내와 콘센트에 코드를 꽂아야 한다. 하루 종일 집 안은 청소를 했음에도 청소하기 전의 상태처럼 보인다. ‘이제 그만 놀고 청소 좀 하셔야겠어요, 게으른 주부님.’하는 상태 말이다. 억울해도 할 수 없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정오는 점심식사도 다르다. 혼자 있으면 냉장고에서 치즈를 꺼내 먹거나 대충 남겨진 빵, 시리얼을 먹는다. 물론 밥도 먹는다. 단 반찬이 있을 경우. 굳이 혼자 있는데, 반찬을 만들어 식탁에 근사하게 차려놓고 먹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방학이다. 아이들이 있으니, 점심도 꼬박 밥과 반찬을 만들어 식탁 위에 올려놓게 된다. 하지만 아들들은 엄마의 노고도 알지 못하고, 식탁을 차리는 걸 알았음에도 “밥 먹자.”라고 말했음에도 “네,” 대답하고는 여전히 거실에 앉아 놀고 있다. “네.”란 식탁 위에 두세요, 놀만큼 놀고 갈게요 라는 뜻인가.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이건 정해진 기한이 있다. 개학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자연재해가 있지 않는 이상 절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오전이 사라진 이 생활도 익숙해질 때쯤엔 끝이 난다. 한 달은 의외로 짧다. 곧 다시 나의 오전이 있는 삶이 오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