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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치유되지 않는 슬픔과 함께 하는 방법.

by 허니모카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리(케이시 애플렉)는 고향을 떠나 보스턴에서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며 혼자 산다. 삶의 즐거움이라곤 없어 보이는 텁텁한 표정으로.

어느 날 형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 맨체스터로 가지만 이미 형은 사망했다. 형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형이 유언장에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자신을 지목했음을 알게 된다.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변호사에게 당황스러움을 드러내고, 친한 이웃주민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대신 후견인이 되어달라고 말한다.

저 남자는 왜 저렇게까지 고향과 조카의 후견을 거부하는 걸까? 그 의문은 리의 회상으로 곧 알 수 있다. 아.. 이런. 이유를 알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술에 취해 잠시 마트에 간 사이, 벽난로 안전망을 하지 않아, 집이 불타고 아이들을 잃었다. 그리곤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어 리는 맨체스터를 떠났다. 고향은 안식처가 아닌 상처투성이다.


아픔과 상처를 들쑤시는 일은 언제나 괴롭다. 설령 그것이 치유되었다 해도 가슴 한쪽이 찌릿한데, 리는 전혀 치유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는 것, 그것도 자신의 실수로. 그것이 과연 극복할 수 있는 일일까?


산다는 건 살아지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태양이 뜨고 지면, 하루가 지나간다. 그럼 하루를 산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태양이 또 뜬다. 그럼 또 하루를 산 것이다. 리는 그렇게 살았다. 누군가의 위로도, 자신의 반성과 후회조차도, 있던 일을 없게 만들진 못하고 쉽게 슬픔에서 벗어나도록 돕지 않는다.


아버지를 잃고도 덤덤하게 묵묵히 살아가는 10대의 패트릭도 살아가는 거다. 멀쩡히 밥 먹고, 여자친구집에도 가고.. 그런다고 슬픔이 없진 않다. 그도 자기 나름대로 견디고 있다.

어쩔 수 없이 후견인 역할을 해야 하는 리는 조카와 보스턴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패트릭은 맨체스터에 살기를 원한다. 누구 하나 양보 없이 서로의 입장만 내세우며 각 자가 원하는 곳에서 살고 싶어 한다.


리는 과연 어떻게 할까? 결국 조카와 맨체스터에 남겠지. 그럼 그의 아픔은 어떻게 되는 걸까?

패트릭보다는 훨씬 어른이니까, 잘 견디며 살겠지. 그래야 하나보다. 역시.. 어른은 슬픔도 잘 치유해가며..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영화의 해피엔딩이란 그런 거니까 하며.



하지만 리는 그러지 않았다. 내 예상을 과감히 깨뜨리고, 맨체스터를 떠나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패트릭은 맨체스터에 남아 학교를 다니고, 리는 보스턴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렇게 서로의 일상으로 돌아가, 연락을 주고받고 간간히 만나기도 하면서 지냈다.


어른인 나조차, 리의 슬픔을 가볍게 생각했던 걸까? 자신의 슬픔을 치유하는 것보다 어린 조카를 보살피는 것이 더 먼저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럼 자신의 슬픔은 누가 치유해줄까. 어떻게 치유될까.

희생하지 않아도,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은 있다.그들처럼.

리의 상처가 하루를 살면, 하루만큼은 치유되기를 바란다.



화재 후, 경찰서에서 진술을 듣던 경찰관이 이제 그만 가도 좋다고 하자, 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다.

“그럼 이러고 끝이에요?”

그러자 경찰관이 말한다.

“리, 끔찍한 실수를 한 것뿐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요. 비난할 생각 없어요.

벽난로 안전망을 깜빡하는 게 범죄는 아니죠.”


타인이 타인을 위로하는 방법이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그것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정당한 길임을 인정하자. 자유로워질 순 없지만, 스스로를 더 끝으로 내몰지 않도록. 슬픔을 안고 가되, 치유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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