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13
거센 바람이 집을 휘감은 밤이면, 문틈으로 스미는 냉기를 먼저 느낀다. 《폭풍의 언덕》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그 찬기가 손끝에서 가시지 않았다. 사랑이 한 사람을 구원하기보다 천천히 파괴하는 과정을, 에밀리 브론테는 기묘할 만큼 담담한 얼굴로 보여준다. 나는 요크셔 황무지의 바람을 따라 걸었고, 돌아보니 내 안의 어떤 어둠과 마주서 있었다.
히스클리프의 발자국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비틀려 있었다. 환영받지 못한 아이의 눅눅한 숨, 문간에서 들은 발소리만으로도 몸을 굳히는 습관, 밥상 끝자리의 식은 접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온기를 “나중에” 되찾기로 결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랑이 결핍에서 시작될 때, 우리는 사랑을 품는 대신 움켜쥔다. 움켜쥐는 손아귀는 어느 순간 “너 없이는 못 살아”가 아니라 “너는 내 것이다”가 된다. 나는 그 경계를 작품 속에서, 그리고 내 삶의 몇 장면에서, 불쑥 떠올렸다.
캐서린의 선택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사랑과 삶의 안정이 충돌할 때, 누구나 잠시 흔들린다. 캐서린은 흔들림 끝에 따뜻하고 매끈한 집을 택했고, 히스클리프는 그 순간 자신이 세계에서 제외되었다고 믿었다. 배신이라 부를 수도 있고, 생존이라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선택에는 각자의 이름이 붙고, 그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 종종 바뀐다. 우리는 타인의 선택을 너무 쉽게 윤리로 재단하고, 자기 변명을 너무 쉽게 운명으로 포장한다. 《폭풍의 언덕》은 그 얄팍한 습관을 들춰낸다.
복수는 한 사람의 마음에만 내리는 사소한 비가 아니었다. 이 소설에서 복수는 기후였다. 계절처럼 순환하지 않고, 대지의 성질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힌들리의 집안이 무너질 때, 이사벨라가 상처를 안고 떠날 때, 캐서린이 병상에서 창문 너머를 붙잡을 때—나는 한 사람의 집착이 어떻게 가족, 이웃, 공동체의 언어를 망가뜨리는지 보았다. 누군가의 사적 고통이 공적 파괴로 번져가는 광경은 낯설지 않다. 회사의 회의실에서도, 주말의 단톡방에서도, 때로는 식탁의 끝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본다. 누군가의 오래된 결핍이 권력과 결합하면, 작은 공간은 금세 황무지가 된다.
그 황무지의 한가운데서 나는 하녀 넬리의 손을 생각했다. 넬리는 사건을 전달하는 입이었지만, 동시에 집의 온도를 재는 체온계였다. 문을 닫는 소리, 컵이 받침에 닿는 가벼운 떨림, 아이의 밤기침. 법률이 닿지 못하는 미세한 진동을 넬리는 늘 먼저 알아챘다. 폭력은 늘 문장보다 빠르고, 증거보다 얕은 자국으로 남는다. 그래서 가정폭력이라는 말이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집 공기가 오늘은 유난히 무겁다”고 말했다. 그 표현이야말로 이 소설이 남긴 가장 현실적인 어휘인지도 모른다.
히스클리프를 미워하면서도,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 대목에서는 연민이 솟고, 다음 장면에서는 몸이 먼저 경계했다. 인간을 하나의 단어로 묶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그는 극단으로 가르쳐 준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 뒤에는 종종 “그래도”가 붙는다. 그래도, 그의 손은 너무 세다. 그래도, 그의 말은 너무 가깝다. 이해와 용서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고, 사랑과 소유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나는 그 두 거리를 헷갈리던 때를 떠올리며 책장을 넘겼다.
작품의 끝에서 헤어턴과 캐시가 서로의 말투를 배우는 장면을 생각한다. 화해는 거창한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낮은 자리에서 천천히 다가간다. 독한 말의 억양을 조금씩 풀고, 서로의 문장을 베껴 쓰고, 낯선 마음의 어휘를 하루에 하나씩 익힌다. ‘집’이라는 단어가 다시 안식의 냄새를 갖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작은 습관이 필요하다. 희망은 사건이 아니라 연습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보여준다. 그러니 이 결말은 행복의 보증이 아니라 회복의 초입이다. 봄은 오지만, 땅은 쉬이 풀리지 않는다.
책을 덮고 나는 나에게 묻는다.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구의 자유를 조금씩 좁히고 있지는 않았는가. 내 결핍의 장부를 타인의 삶으로 상쇄하려 들지는 않았는가. 어떤 날에는 ‘배려’ 같았던 행동이 사실은 ‘통제’의 다른 얼굴이 아니었는가. 《폭풍의 언덕》은 남의 비극으로 쌓은 탑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우리 안의 오래된 그늘을 데려와 햇빛 아래 세워 둔다. 눈이 부시다고, 고개를 돌려버리면 그늘은 더 길어진다.
에밀리 브론테는 서른 해의 짧은 생을 살았다. 생전에는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 사실이 늘 마음에 걸리다가도, 나는 생각을 고친다. 그의 소설이 지금 여기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멈춰 세우고, 어떤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건 뒤늦은 위로이자 늦지 않은 영향이다. 문학이 하는 가장 현실적인 일은 우리를 잠깐 멈추게 하는 일, 그리고 멈춘 자리에서 질문하게 하는 일이다.
바람이 잦아든 밤, 창문을 살짝 열어 본다. 차가운 공기가 손등을 스치고, 멀리 풀잎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사랑이 파괴로 기우는 순간, 나는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그리고 내일 아침, 나는 어떤 말투로 그 사람을 부를 것인가.
그 질문을 품고 잠들 때, 황무지는 조금 덜 황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