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16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130여 쪽의 짧은 분량이지만, 페이지마다 밀도가 높아 오래 남는 소설입니다. 작품은 서문–수기–후기의 틀로 구성됩니다. 이야기의 화자는 요조를 직접 알지 못하고, 단지 교바시의 마담에게서 건네받은 요조의 수기를 그대로 옮겨 적었을 뿐이라고 말하죠. 서문은 사진 속 요조의 인상과 분위기를 짧게 전하고, 후기는 그 수기가 전달된 경위를 덧붙이며 담담히 마무리합니다.
요조의 수기는 유년기–학창 시절–성인기의 세 편으로 나뉩니다. 1인칭 기록의 형식 덕분에 고백은 더 사실적으로, 감정은 더 차분하게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서술은 건조하지만, 오히려 그 건조함이 비극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p13) 첫 문장부터 소설의 핵심 정서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해 불가능한 세계 앞에서 요조가 택한 생존법은 익살—사회적 가면이었습니다.
요조의 생애는 다자이 오사무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처럼 보입니다. 다자이(본명 쓰시마 슈지)는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도쿄 제국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좌익 운동 가담, 연인과의 동반자살 시도, 마약 중독, 정신병원 수용 등 파란의 이력이 요조의 이야기와 겹칩니다. 1945년 패전 이후 그의 작품은 공황 상태의 젊은 세대에게 강한 지지를 받았고, 결국 다자이는 서른아홉에 생을 마감합니다. 대표작으로 『여학생』, 『직소』, 『앵두』 등이 있으며, 『인간 실격』은 2023년 교보문고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고전소설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엄격하고 냉랭한 가정 분위기, 하인들의 가식과 위선 속에서 요조는 익살로 스스로를 지킵니다. 도쿄로 올라와서도 머리는 명석하고 성적은 좋지만, 진지하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 세계 바깥에 서 있습니다. 그러다 호리키를 만나 술·담배, 공산주의 독서회에 발을 들이며 경계가 허물어지고, 결국 연상 연인과의 동반자살 시도에서 자신만 살아남아 자살 방조죄 조사를 받게 되죠. 죄책감과 혼돈, 아버지의 지원 중단 이후 그는 무명 만화가의 길을 걷습니다.
요조는 요시코와의 결혼으로 잠시나마 안온한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순결하고 신뢰가 깊은 요시코가 상인에게 겁탈당하는 사건은 요조를 다시 심연으로 떨어뜨립니다. 순수함마저 폭력에 이용되는 장면을 목도한 그는 모르핀 중독에 빠지고,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됩니다. 여기서 요조는 신에게 묻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 그리고 선언합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p130) 가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계 앞에서, 요조는 스스로 가치의 상실을 결론처럼 받아들입니다.
요조는 군중의 호감을 사는 인싸 같지만, 사실은 아웃사이더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부와 지성, 익살이라는 사회적 표면 아래, 그는 세상의 규범과 가치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의 분노는 호리키를 향해, 그리고 요시코를 해친 세상을 향해 치솟습니다.
호리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요조: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납하지 않는 거겠지.”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p96)
요조에게 ‘세상’은 실체가 아니라, 개인의 의견이 보편의 이름을 빌려 행사되는 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묻습니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p116) — 순수가 훼손된 뒤의 치명타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회복하기 어려운 차원임을 작품은 보여줍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우리는 요조의 나이를 확인하고 한 번 더 숨을 멈춥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p132)
고작 스물일곱. 그 무게를 견디며 ‘인간 실격’이라는 낙인을 스스로에게 찍는 청년의 얼굴이 눈앞에 겹쳐집니다.
1948년에 발표된 이 얇은 책이 오늘 다시 열광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양극화, 불안, 소진—우리 시대의 공기 속에서 요조의 고백은 낯설지 않습니다. 수기 형식의 담담한 문장, 극한 감정의 솔직한 고백은 독자에게 일종의 대리 용기를 건넵니다. 말하기 어려운 감정을 누군가 먼저 말해준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그리고 끝내 남는 한 줄.
“제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지나갈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버틸 것인가. 『인간 실격』은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 가면으로 버틴 시대를 지나 맨얼굴로 버티기 위한 질문입니다. 짧지만 단단한 이 질문이, 책장을 덮은 뒤에도 오래 귀에 맴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