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혼란의 끝에서 시작

책 속에서 마주한 나 _ 17

by 뉴우바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마지막 문장처럼, 이 소설은 결말에서 독자를 다시 출발점으로 돌려세운다. “에이드리언은 왜 자살했는가?”, “토니의 편지는 어디까지 원인이 되었는가?”, “베로니카의 엄마와 에이드리언 사이의 아이는 누구의 책임인가?”—꼬리를 무는 질문은 책장을 덮고도 진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한 번 읽고 끝낼 수 없는 책이다. 혼란이 해체가 아니라, 다시 읽기를 부르는 초대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무심한 남자 토니 웹스터는 자신의 젊은 날과 노년의 현재를 오가며, 친구 에이드리언 핀의 자살을 더듬는다. 전학생으로 들어와 지성과 겸양으로 빛나던 에이드리언, 그리고 토니의 연인이었다가 멀어진 베로니카. 실연 뒤 홧김에 보낸 한 통의 편지는 시간이 흐르며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세월 후, 베로니카의 엄마로부터 오백 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소식을 전해 들은 토니는 베로니카를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썼던 편지의 원본을 돌려받고, 그 편지가 잔혹한 악담으로 가득했음을 뒤늦게 직면한다. 토니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특수한 돌봄이 필요한 아들을 만나고, 그 순간부터 모든 불행의 인과를 자기 탓으로 연결하려 한다. 그러나 확신 끝에는 사실 부재의 벽, 그리고 “책임은 있으나 해답은 없다”는 거대한 혼란만 남는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p.34)


이 문장은 작품의 심장처럼 뛰는다. 이 소설의 사건들은 **기억(토니의 1인칭)**과 **문서(편지·유언·일기장)**로만 간접 제시된다. 독자가 접하는 것은 언제나 토니의 서술에 의해 굴절된 세계다.
토니는 과거의 자신을 “순진하고 평범한 사람”이라 믿지만, 그가 쓴 편지는 누군가의 삶을 바꿀 만큼 폭력적인 언어였다. 베로니카는 명확히 말하지 않고, 토니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자신의 불안과 해석의 편의를 앞세운다. 이때 독자는 깨닫는다. 진실은 부재가 아니라, 접근 방식의 한계 속에 있다는 것을.


한 통의 편지가 낳는 파문은 하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성찰하지 않는 평범함이 타인에게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남긴 마지막 당부—“사유하라”—는 반스의 소설에서 **“기억을 의심하라, 언어의 결과를 숙고하라”**는 윤리로 변주된다.
토니의 후회는 늦게 도착했고, 용서를 청할 상대는 이미 세상에 없다. 그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사유의 지속뿐이다.


토니 웹스터: 평범함이라는 자기서사를 믿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무신경과 자기중심성이 드러난다. 그의 1인칭은 독자의 추리를 의심과 재독으로 이끈다.


베로니카: 정보를 쥔 채 단서를 애매하게 흘리는 인물. “넌 늘 그랬어”라는 말은 토니 개인을 넘어 우리 모두의 인식 습관을 겨냥한다.


마거릿(전처):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현실 인식의 거울. 토니의 독백적 세계에 차가운 문장으로 균열을 놓는다.


에이드리언 핀: 이성의 윤리와 실존의 결단을 함께 상징한다. 그의 부재는 질문의 형태로 끝없이 현재를 괴롭힌다.


반스는 반전의 묘미를 노리는 대신, 독자에게 책임을 돌린다. 결말의 혼란은 실패가 아니라 방법이다. 우리는 두 번째 읽기에서야 문장 사이의 공백, 기억의 생략, 편지의 어조를 본다. 그리고 묻는다. “나는 내 기억과 언어에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로 명성을 얻었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2011)**을 수상했다. 젊은 시절 사전 편찬 작업과 평론을 거친 그의 경력은, 이 작품의 문장 단위 집요함과 기억·기록에 대한 집착으로 스며든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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