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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Feb 15. 2024

어느 해,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사랑


어느 해, 밸런타인데이 - 초콜릿 사랑



우리 동네에는 상가와 식당이 많다. 문득  밸런타인 데이를  떠 올랐다. (어젯밤)저녁을 먹은 후,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갔다가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요즈음도 초콜릿을 주고받나? 궁금했다. 딸이 초콜릿을 들고 와 아빠와 오빠에게 전해주면 나까지 달콤한 날을 보내던 날이 그립다.  아이들이 없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집에서만 지내다 보니 이런 소소한 풍경 속에서 밀려나 있는 느낌이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보니 식당들마다 손님이 많다. 요즈음은 코로나 시절보다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다. 군데군데 있는 편의점 앞을 지나며 살피니 초콜릿을 쌓아 놓고 장사를 하던 지난 간 시절의 밸런타인 데이 풍경과는 다르게 초콜릿 장사에 열을 올리지는 않는 것 같다. 이미 밤시간 이어서일까?




지금은 아기 아빠인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다. 졸업식날 아침에 싸락싸락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엄니,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셔야 해요."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어머님과 집을 나섰다. 아파트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택시를 타려 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아껴야 하는 어머님은  멀지도 않은 거리를 돈 아깝게 무슨 택시를 타냐며 당신은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다며 부지런히 앞장을 서서 걸어가신다.  


아파트 단지를 채 벗어나기도 전에 사건이 발생했다. 어머님이 미끄러지셨다.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우니 한쪽 팔목이 덜렁 거린다. 결국 싫다던 택시를 부르고 우리는 병원으로 가야 했다. 병원에서 깁스를 하고 돌아온 어머님은 한 마디 말씀이 없으시다. 사랑하는 손자에게 꽃다발을 안기려던 꿈이 사라진 것도 모자라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무척 속이 상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랴. 졸업식은 지나갔으니 이제 몸이나 잘 추스르라고 할 수밖에.  


며칠이 지나갔다.  아침상을 준비하는데 텔레비전에서 밸런타인 데이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에요. 사랑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라고요. 엄니, 혹시 노인정에 좋아하는 할아버지 없어요? 맘에 드는 할아버지한테 초콜릿 선물 좀 하세요."

 깔깔거리며 어머님을 놀리는 내 마음은, 불편함으로 시무룩한 어른을 웃겨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침묵으로 나를 바라볼 뿐 결코 웃지 않으셨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으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부지런히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상을 준비하고 나니 어머님이 계시지 않았다. 상을 차리는 사이, 한쪽 팔을 쓰지 못해 행동이 불편한 어머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아직 길이 미끄러울 텐데. 아직 노인정은 문도 열지 않았을 텐데. 어디를 가셨을까? 평소 장난을 즐기지 않는 분에게 내가 너무 심한 농담을 했나? 아침 일찍 이웃집에 놀러 갈 어머님도 아니다. 아무 말씀도 없이 휴대전화까지 집에 두고 어디를 가셨을까? 온 가족이 바깥을 살피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가족들의 걱정 사이로 어머님이 등장하셨다. 이른 시간에 제과점을 다녀오신 모양이다. 알록달록한 포장지에 싸인 초콜릿을 당신 손자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파트 단지에 있는 슈퍼에서 파는 초콜릿이 아니고 제과점의 비싼 초콜릿이라니. 무엇이든 실속이 있어야 한다며 포장이 없는 싼 물건만 골라서 사는 분이 화려한 포장의 제과점 물건을 사 오시다니.  


 놀라는 가족 사이에서 활짝 웃으며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용돈 아껴서 졸업식에 꼭 꽃다발을 사 주려했는데…. 다쳐서 졸업식도 못 갔으니 애한테 미안해서 많이 속상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남자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 있다니. 세상에 이렇게 고마운 날도 있구나.”  


 때로는 진열장에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앉아 있는 초콜릿을 바라보며 실속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외국에서 건너온 풍속과 제과회사의 상술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즐기는 날인 줄만 알았던 밸런타인데이가 팔순 어머님의 우울증을 치료해 주는 날이기도 했다. 며칠 동안 우울하던 마음이 녹아 달콤한 아침을 맞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십년 전의 그날을 생각했다. 어머님은 떠나시고, 아들은 아들의 아빠가 되고, 나는 이제 자 손녀를 두고 나이들어 어머님을 닮아가고 있다. 문득 달달한 무언가가 먹고 싶다. 지나간 시절의 소소한 풍경이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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