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햇살 속에서 나무들이 초록으로 빛난다. 초록의 정원에는 노랗고 하얀 꽃들이 가득하다. 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밀며 요양원의 정원을 걸었다. 꽃이 예쁘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입에서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나온다. 가만히 귀 기울이다가, 이렇게 좋은 날 노래를 부르려면 더 큰 소리로 부르라고 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음정 박자는 어머니의 작곡이지만 가사만큼은 우리가 어린 시절이었던 어머니의 젊은 날 노래다.
오래전 우리 집은 마루 위에 서서 보면 울타리 밖이 환이 보였다. 마당을 지나 사립문을 나서면 초록의 논이 펼쳐지는 넓은 들이 보이는 마을이었다. 그 시절 농촌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을 형편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비바람 피할 정도의 초가삼간이었다. 그 집에 기와를 얻고, 대청마루까지는 아니지만 흙 봉당 위에 마루를 깔았다. 마당에 있는 공동우물에 나가지 않아도 될 펌프가 놓였다. 집은 어린 우리들이 자라는 것처럼 울타리가 생기고 담장에는 장미덩굴이 우거지는 집으로 변해갔다. 큰댁의 안방을 지키던 괘종시계를 부러워했었지만 정시가 되면 뻐꾸기가 우는 벽시계를 사들고 들어온 어머니의 얼굴에는 하루 종일 웃음이 가득했다. 재봉틀만 있으면 다시는 소원이 없을 거라던 어머니의 꿈이 이루어져 우리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곤 했다.
어린 마음으로 보면 어머니가 소망하던 것 중에 많은 것이 이루어진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보니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포기하며 살았을 것 같다. 삶이라는 게 내가 꿈꾸고 목표하는 일들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내 일이 아니기를 바라던 일이 일어나는 게 삶이다. 가슴에 묻어놓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한 생애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다. 휠체어를 밀며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엄마 없이 자라 결혼을 해서 아내와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기까지 어머니의 지난 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까지는 의지해야 할 엄마 없이 살았던 어머니의 지난 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딸로서 기대어 살기만 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어머니의 노래가 반복되고 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시절이 지나가면서 어머니에게 조금의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추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이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곤 했다. 때로는 마을 아낙들이 모여 놀곤 했는데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지 못한다고 했다. 사는 일에 바빴으니 노래를 부를 시간이 없었고 아는 노래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노래를 가르쳐드리기로 했다. 나는 음악시간이 제일 싫던 음치다. 음정 박자는 무시하고 싶지 않지만 무시가 되는 실력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가사를 외우게 했다. 가사를 외운 후 녹음기를 틀어 놓고 따라 부르게 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고 싶다"는 가사는 어머니 마음에 쏙 드는 것 같았다.
퇴직을 하신 아버지가 새로 집을 지었다. 텃밭 가에 있는 밤나무 아래 평상을 놓았다. 어머니는 바람 부는 그늘에 앉아 밭에 심은 곡식들을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곤 했다. 나이가 많아 힘드니 농사를 짓지 말라는 말에 농사지은 걸 먹는 입이 예뻐서 농사를 그만둘 수 없다던 어느 날이 떠오른다. 그림 같은 집에서 한 백 년 살자던 어머니의 꿈은 사랑하는 임이 멀리 떠남으로써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이제는 건강을 잃어버린 어머니가 자꾸만 새댁 시절로 돌아간다. 때로는 뒤엉킨 시절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지만 여전히 예쁜 딸로 기억해줘서 좋다.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라며 딸의 입에 들어갈 밥을 걱정하시며 농사 이야기를 한다. 단오가 지나고 이제 머지않아 장마가 올 것이니 들깨를 심었느냐고 묻는다. 텃밭 한 평 없는 내가 맞장구를 친다. 팔을 건 없고 먹을 만큼만 깨를 심었다는 말에 어머니가 함빡 웃으신다. 깨가 쏟아지는 이야기가 계속되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시간이 흘러간다. 예전에는 농사지은 걸 먹어주는 내 입이 예뻤겠지만, 지금은 농담을 담은 내 말에 티 없이 웃으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예쁘다. 참 예쁘다.
어머니가 다시 노래를 부르신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유일하게 가사를 기억하는 노래가 반복된다. 어머니는 지금도 푸른 초원 위에 집을 짓고 꿈을 꾸고 계실까? 가지각색의 꽃이 핀 푸른 정원을 함께 지나가며 앞으로도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자식들의 예쁜 입을 생각하며 푸른 초원에서 임과 함께 농사를 짓던 그 날들. 그날의 기억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젊은 날 이야기를 계속 나눌 수 있는 오늘만큼의 날들이 계속되기를 기도해 본다.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뻐꾸기 소리에 맞추어 어머니의 노래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