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어머니 이야기를 써서 상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씩씩하던 어머니였다.
딸이 꽃다발 받는 걸보고 한없이 좋아하던 어머니다.
중년이 넘어가는 딸이 받은 꽃다발을 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 하고 싶어 하던 공부를 시켰으면 뭘 해도 했을 텐데.
대학에 가고 싶다고 어린 시절 철없이 투정 부리던 날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 오기도 하던 날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가 건강할 때 예쁜 모습으로 박수를 받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어머니와 하룻밤을 잤다.
- 얘, 너는 애가 몇이냐?
꽃같이 예쁘고 하루 종일 피곤도 모르고 농사일을 하시던 어머니가 작아진 몸으로 내게 물으신다.
- 딸이 최고여. 딸 하나 더 낳아라.
- 엄마, 지금 내 나이에 애를 낳으면 내가 80까지 애가 시집도 못 가.
- 에그머니. 니가 벌써 80 이여?
어머니가 너무나 엉뚱하다.
엄마와 함께하는 밤,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었다.
(지난 블로그를 읽다가 그날이 생각나 옮겨왔다.)
코로나 19 상황이 시작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 몇 십 명의 확진 자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에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실을 교대로 들락거리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손을 잡고 몸을 주물러 드렸다. 식구가 많아 입원실에 한꺼번에 들어가지 못하고 교대로 드나들어야 하는 게 안타까웠다. 그러나 코로나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어머니의 병세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반 병원을 나와 요양병원으로 입원했다.
2년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신다. 입원 초기에는 그나마 가끔은 병원에 들려 어머니의 손을 잡아 볼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대면 면회가 허용되는 동안 몇 달 만에 교대로 한 번씩 어머니의 얼굴을 보고 올 수 있었다.
- 엄마, 자주 못 와서 미안해.
- 괜찮아. 시절이 그런 걸 어떡해.
육남매가 자주 모여 왁자지껄하던 분위기를 기억하실 어머니가 우리를 위로 한다.
가족은 어렵고 힘들 때 함께 해야 한다. 아픈 몸으로 하루 종일 병실에 누워 있어야 하는 외로움과 고통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간병이의 도움으로 견뎌내며 지내는 날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