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손녀를 오 년 동안 키웠다. 태어나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5년이 넘도록 키웠으니 아이는 낯을 가리지도 않았고 아무런 부담 없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돈독한 정을 나누며 지냈다. 이제 거의 2년 가까이 헤어져 지내는 동안에도 수시로 전화를 해 보고 싶다고 하면 달려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다. 아이가 크면서 언젠가는 친구가 더 좋아지게 되어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지 않게 되겠지만, 그 시간이 되도록 늦게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아이와 있는 시간에는 혈기 왕성하게 자라는 아이와 함께 뛰어놀기가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는 아이의 부름에 꼼짝없이 달려가는 손녀바보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고 나니 아주 똘똘해졌다. 물론 그 나이만큼의 평범한 똑똑함이지만, 고개도 못 가눌 때부터 마마마, 바바바 하는 옹알이부터 들어온 내게 매일이 다른 아이의 성장은 늘 놀랍고 그러므로 자랑스러움은 배가 된다. 아이가 그렇게 할미를 바보로 만든다. 그러나 이제는 그 바보에서 탈출해서 똑똑한 할머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밤이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잠을 자는데, 할아버지에게는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내게는 동화를 지어서 들려 달라고 한다.
" 동화를 지으라고?"
"응. 아주 길게."
내가 읽은 동화책이 별로 없으니, 그동안 아이에게 읽어 주었던 동화책을 다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비숫하게 이야기하면 "그 거 책으로 읽었잖아." 하면서 할머니보고 이야기를 지으란다. 난감하다. 뭘 어떻게 지어야 하는데? 말은 못 하고 머릿속이 뱅뱅 돈다. 무슨 이야길 해야 하나?
내가 어렸을 적에는 동화책이 없었다. tv도 없던 시절이다. tv는 커녕 금성사( 엘지전자의 전신)에서 나온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에는, 아주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었으나 전깃줄 같은 선을 이용해서 보급용 스피커라는 물건으로 방송을 들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주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스피커가 없던 시절의 여름밤에는, 바깥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 누워 모깃불을 해 놓고 하늘에서 반짝이며 쏟아질 것 같은 별들 저 너머에 있는 하얀 은하수를 보며 할머니의 옛날이야길 들었다. 겨울밤은 길다. 그 긴 밤을 웃풍이 심한 방에 화롯불을 피워놓고 밤이나 고구마을 구워 먹으면서 할머니의 옛날이야길 들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이미 50년이나 60년이 된 기억이다. 어쩌면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겠으나, 어린 시절 우리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참 많이 해 주었던 분으로 기억한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이야기,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나 콩쥐팥쥐 이야기를 넘어, 스님이 지팡이를 꽂아 놓고 갔는데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기억난다. 삼 년 벌레에 물린 노인의 이야기, 은혜를 갚은 호랑이 야길 그때 들었던 것 같다. 동화책이 없던 시절에 그런 이야길 기억한다는 건 내 할머니 덕분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내가 자라면서 편집된 기억도 많이 있겠지만 내 할머니는 재미있는 옛날이야길 참 잘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는 그 이야길 어디서 들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구전동화 이야기였겠지만,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는 '얘기책(심청전이나 춘향전 같은)'이라는 이야기 책이 있기는 했지만 한글을 전혀 모르던 할머니가 책을 읽었을 리는 없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어느 사찰에 갔을 때 그곳의 큰 나무가 "옛날에 어느 스님이 꽂아 놓은 지팡이가 몇 백 살의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을 들으며 할머니 이야길 생각했었다. 이 나무가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로 들려주시던 그 나무였을까?
문맹이었던 할머니도 구수하게 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하던 시절 이야길 들려주셨는데, 자칭 책을 좋아한다는 내가 아이에게 이야길 해 주려니 막막하다. 동화책 이야길 시작하면 그건 이미 읽었단다. 옛날 옛날에 하면서 전래동화를 시작하면 그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니 할머니가 지어서 들려 달란다. 어쩌나? 나는 동화 작가가 아닌데? 할아버지에게는 책을 읽어 달라면서 내게는 동화를 지어서 들려 달라는 어려운 주문을 하니 참 난감하다.
아이의 집에서 기찻길이 보인다. "아주 오래전 옛날에 파랑이와 노랑이와 보라가 기찻길 옆에 살았는데...." 이렇게 시작하면서 어설프지만 어린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 어린 시절 기차가 다니던 마을에 있었을 법한 이야길 엮어 보았다. 아이는 아주 재미나다고 깔깔 대며 이야길 듣는다, 눈은 총총이 빛나고 입으로는 맞장구를 치면서 아주 재미있어한다. 다행이다. 나의 이 무모한 창작을 아이가 재미있어하다니. 허구지만 사실을 담아 이야기해야지 엉뚱한 거잣정보를 어린아이에게 심어 주면 안 되니 옛날옛적 풍경을 내 나름대로 구성을 하느라고, 정말 엄청 수고했다. 더불어서 잊었던 것 같은 내 지난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올라오기도 한다. 그날, 나는 아이의 옆에서 단밤을 잤다. 아이도 할머니의 이야기에 힘입어서 단잠을 자며 예쁜 꿈을 꾸었길 바란다.
기찻길옆 오막살이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다. 아이와 함께 손뼉을 치면서 동요도 불렀다. 옛날에 기찻길 옆에 오막살이가 많았겠지만, 기찻길 옆이 아니라 하더라도 농촌 지역에는 초가집이 참 많았다. 가족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도중에 우연히 초가집 이야기가 나왔는데, "할머니는 기와집에 살았어" 하는 딸의 말에 손녀가 반기를 든다. "할머니는 옛날에 기찻길옆 초가집에 살았다는데? 그렇게 옛날 이야기 해 줬어." 허술한 구성의 옛날이야기가 아마도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며칠이 지나 다시 생각하니 아이에게 수정을 해 주어야 했을 것 같다. 딸이 기억하는 외갓집은 기와집이 맞다. 그러나 옛날 생각을 다시 해 보니 기와집에 살은 건 중학교 때인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초가집에 살았고, 기찻길 옆은 아니지만 지금보다 훨씬 조용했던 시골마을의 밤 시간에는 멀리서 기차 가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랬다고, 아이의 질문에 사실대로 설명해 주었어야 하는 건 아닌지? 네가 들은 이야긴 그냥 할머니가 지어 낸 이야기였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지? 이야길 지어 달라고 해서 내 어린 시절에 빗대어 허구로 만들어 낸 어설픈 구성의 옛날이야기를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들었나 보다. 아이가.
아이가 커 가면서 똘똘해지는 것을 보며 놀라지만, 그만큼 나 역시 똘똘해지도록 노력해야 될 일이다. 손녀바보지만 한편으로는 책도 더 읽고, 아이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 더 해야 될 것 같다. 이제부터는 갈수록 기억은 희미해지고 몸은 무거워지고 눈은 침침해질 텐데, 세상의 흐름에 밀리지 않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 아이와 대화가 잘 통하는 할머니가 되기 위해 이젠 독서의 범위에 동화책을 추가해야 될 것 같다.
사진. 아이랑 함께 갔던 양주 나리공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