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다녀왔다
3일4일 동안 제주를 다녀왔다. 내시간이 없이 살아가는 중에도 갑자기 시간이 났다. 외국 출장 중이던 사위에게 귀국날자가 잡히고 나니 딸이 휴가를 받았다. 손녀를 돌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사위와 딸의 휴가는 곧 우리 부부의 휴가나 다름없다. 모처럼의 휴식시간이지만 한 여름이라 더위를 피해 강원도와 경기도의 dmz지역을 여행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그나마 그 지방이 제일 북쪽이라 덜 더울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생각에서다. 혼자의 생각이었다.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남편이 말한다.
- 제주도 가자. 비행기 알아 봐.
- 당장 다음 주에?
외국도 아니고 국내에서 움직이는데 당장 다음 주면 어떤가? 비행기 표만 있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남편이다.
제주 여행은 다섯번째다.
80년대 중반 신혼여행이 첫 제주 방문이었고 당연히 처음 타 보는 비행기였다. 그 시절,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떠나는 신혼 여행은 신혼부부에게 꽤 괜찮은 신행이었다. 정장을 차려입고 여행하던 시절이다. 지금생각하면 다소 촌스럽지만 집 떠나 멀리가는 여행이니 잘 차려입고 떠났다. 신혼부부가 가득한 대형버스를 타고 안내양의 설명을 들으며 떠났던 여행.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용두암이나 만장굴을 갔었던 것 같다. 이미 60대가 되었을 그때의 신혼부부들은 아들 딸 낳고 키워 손자 손녀를 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 거다. 대부분은. 모두가 그렇게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 살아있기를 바란다.
두번째 제주 여행은 결혼 20주년 때였다. 젊은 나이에는 사는 게 바쁘고 여행문화도 지금과 달라 멀리 떠나는 여행은 하지 못했다. 떠나기 좋아하는 남편을 따라 아이들 데리고 원주 근교나 에버랜드나 민속촌 같은 곳은 참 많이도 다녔다. 그러다 사회 분위기도 달라지고 여행에 관심을 가지는 중년이 되면서는 점점 멀리 우리나라 곳곳을 여행했지만, 비행기타고 떠나는 제주는 여전히 만만치않은 여행지였다. 지방에 아울렛이 생기고 거기서 양복과 와이셔츠를 구입하고 얻은 행운권 덕분에 반 값 정도의 혜택을 받아서 제주로 떠날 수 있었다. 행운권 받을 때 지정된 호텔에 묵었지만 여행은 자유라서 한라산 정상에 올라 백록담을 구경한 여행이었다.
세번째 제주는
-우리 내일 제주 갈까?
라는 말에 내일보다 하루가 더 지나서 떠난 무작정 여행이었다. 저가항공이 생겨나면서 제주행 새벽비행기가 싸다는 말에 우리도 한번 가 보자, 하며 지방에서 밤차를 타고 김포까지 가서 새벽비행기로 떠난 제주여행이었다. 렌트카를 빌려서 바닷가를 돌면서 저녁이 되면 그곳에서 숙소를 구해 잠을 자는 여행이었다. 나이들어가는 내 친구들이 "여행사 가이드 없이 그냥 갔다고?" 하며 놀라기도 했다. 우리 또래 친구들의 여행은 언제나 패키지였으니 그 또한 지금의 여행스타일과는 다른 시절 이야기다. 그 때가 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무척 피곤하던 시기였지만 주변의 염려와 달리 여행은 즐거웠다. 나, 이렇게 떠날 수 있는 몸이야, 자신감을 얻은 여행이었다.
남편이 제주에서 한 달을 지내보자는 말에 겁이 덜컥났다. 늘 병원을 다녀야 하고 허리가 아파 치료중인지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제주는 우리 나라다. 우리나라이니 언제라도 병원 가는 일은 제동이 걸리지 않으니 용기를 내어볼까? 망설이다가 남편을 따라갔다. 제주에서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숙소에서 뒹구는 날도 있었지만 올레길을 중심으로 걸으며 제주를 둘러보는 시간이었다. 잠깐의 여행객들이 들리는 곳은 물론이고 제주 사람들이 사는 곳곳을 걸어보는 여행이었다. 제주는 마음에 들었다. 육지의 말과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제주의 방언들이 동굴동글하니 예쁜 말과 아직은 자연의 모습을 간직한 제주의 돌담도 참 좋았다. 돌담길을 걸으며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무질서 한듯한 검은 현무암의 바닷가에 앉아 태풍으로 성난 바다도 바라보면서 나를 다스리는 여행이었다.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섬이 우리나라 섬이어서, 제주의 바다들이 우리나라 바다여서 참 좋았다.
이번에 다섯번째 여행은 갑자기 떠났기에 어디를 갈 것인지를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아가와 지내는 일이 내게는 버거운 일이다. 가정일과 아이를 돌보며 여행의 계획을 세울 수는 없었다. 내 몸은 늘 피곤해서 건강도 챙겨야하기에 정말 여유없는 생활이다. 그 여유없음 속에서, 갑자기 결정한 여행의 스케줄을 잡지 못했다. 그냥 제주에 도착했다. 달랑 렌트카만 예약을 해 좋았기에 숙소가 없으면 차박하지 뭐, 하고 생각했으나 제주에는 숙소가 너무나 많았다.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거나 직접 방문하거나 숙소들이 많았다. 해외 여행을 하지 못해서 제주에 여행객이 많다고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숙소도 다양하고 많았다. 잠만 자는 숙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묵었던 숙소들의 건물도 빈방이 많았다. 하지만 음식값은 비쌌다.
제주는 경치 좋은 곳이 많다. 제주 한달 살기 이후 5년만에 찾은 제주에는 카페가 엄청 많았다. 바닷가를 돌았던 지난 여행에서는 제주 집을 그대로 이용한 자그마하고 아기자기 귀여운 카페들이 많았는데 이번 여행에서 느낀 건, 경치 좋은 곳은 대형카페들이 다 차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물론 잘 꾸며진 곳에 경치 까지 좋은 카페에 앉아 있으면 좋다. 반면에 자연 그대로의 제주 모습이 사라져 아쉽기만 하다.
세상은 젊은 사람들이 끌고 간다. 지나간 세대보다는 앞으로의 세대가 원하는 방향으로 세상은 바뀌어 간다. 옛 모습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가 우선이다보니 여행객을 부르는 관광지의 모습도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사이에 변해버린 제주의 모습에는 아쉬움이 많다.
하지만 그건 옛 시간을 그리워하는 나의 아쉬움에 지나지 않을 것일 수도 있다. 3분마다 비행기가 뜨는 제주 공항을 찾는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지금의 모습이 그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고, 훗날에 지금의 모습이 그들에게 그리움의 기억이 될 것이니까. 그러니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겠지. 지나간 세대인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다시 언젠가 제주를 가면 오늘의 모습이 그리워 질 거다. 나이가 들면서 먼 해외나들이보다는 가
까운 곳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내일이 올 것이고, 그 때는 또 오늘을 그리워하며 여행길에 오르겠지? 아쉬움 속에서도 여전히 제주는 아름다웠고 또 가고 싶은 여행지다. 제주가 우리나라여서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