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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Feb 20. 2022

혼자 쓰는 일기

나이

나이



모처럼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채널을 돌리다 보니 7080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단순해 보이지도 않는 무대에서 오래전에 지나간 노래들이 불러지고 있었다. 사회자는 거의 흰머리가 다 된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편안하게 보이는 것은 나도 그와 함께 나이가 먹었음을 인정하는 동료의식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면 우리도 아저씨 아줌마가 된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요.’


그래.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어리고 젊을 것 같았다. 십 대의 어린 시절에는 오히려 나이가 빨리 들어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나이가 들어감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스물몇 살 무렵이었다. 두세 살만 어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직장을 다니던 70년대 말에는 20대 중반이면 새로운 직장을 옮기기 어려웠다. 곧 결혼을 할 것이라는, 여자는 결혼하면 살림에 전념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때라서 나이보다 두 살쯤 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 무렵부터 나이 들어가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직은 젊은 이십 대이기에 더 나이가 많아진 모습은 상상하지 않았다.  


서른 살이 넘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 때도 조금만 더 어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리고 날씬하다면 예쁜 옷도 입어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가정에서 살림하고 아이만 키우다가 사물놀이를 하는 작은 모임에 가입했다. 그곳에는 나이 든 언니들이 많았다. 어느 사이 서른일곱이 되어 있었다. 매사에 소극적이던 나는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언니들을 바라보면서 내 나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마흔이 넘은 언니들이 나를 바라볼 때 얼마나 좋은 나이겠는가. 비록 조금 더 어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날이 많았지만, 내가 마흔이 넘었을 때는 어리고 예뻤던 서른일곱이 그리울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이 먹었음을 한탄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는 어려서 시작하는 것이 가능성 많고, 선택의 폭도 넓고, 반짝이는 머리가 기억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서 발전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나이를 푸념할 시기는 아직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마흔이 넘은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랬었지만 마흔이 넘었을 때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시작하기에는 늦지 않았을꺄, 하는 생각으로 많이 망설여졌다. 어느 사이에 사회는 많이 변해서 나이 든 여자의 사회활동이나 무엇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이미 사라졌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용기를 냈다. 책을 들고 공부를 시작했다. 비록 스무 살의 딸아이처럼 반짝이는 머리는 되지 못하더라도 내 나름대로 이해의 폭을 넓히며 책장을 더듬었다.


벌써 오십 대가 지나갔다. 공자는, 나이 오십이 면 하늘의 명을 깨달아 알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치를 아직 깨달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린 시절처럼 나이 먹었음을 한탄하지도 않는다.


며칠 전에 아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입었다. 당장 소리 높여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그 사이에는 이웃이 있었다. 공개적으로 내가 그를 공격한다면 이웃들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 사람 모두를 상대해야 하는 이웃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죽였다. 오해를 하도록 만든 것도 내 잘못일 테니까. 어려웠지만 나만 생각하지 않고 참으면서 이웃을 바라볼 줄 아는 것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찾아온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하늘의 뜻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웃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이 나이가 가져온 성숙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나이 든 또 다른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십이 넘었지만 아직 결혼을 못했다는 가수는 여유 있고 퉁퉁한 몸으로 내가 스물몇 살에 즐겨 듣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몇십 년이 지난 그 노래가 하나도 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신나고 즐거웠다. 지금은 흰머리가 더 많은 중년이 되었지만, 나이가 들면 아저씨 아줌마가 될 것이란 생각을 못하던 시절처럼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녀를 따라 춤도 추고 싶었다.   


 아이들이 보면 나이 든 엄마가 애들처럼 놀고 있다고 웃겠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가끔은 이렇게 철없이 놀던 시절을 기억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나이 들었음을 인정하면서, 또래들과 함께 옛날을 기억하면서, 주어진 오늘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세상을 생각해 보는 지금이 행복한 시간이다.


언제인가 먼 훗날에는 흰 머리카락이 늘어가는 오늘이 정말로 아름다운 젊은 날이었다고 추억할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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