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이 밝다. 연둣빛 새싹들이 고개를 들고 나뭇가지에서는 꽃이 피어나는 봄날이다. 화사함이 가득한 봄날에 어머니는, 우리 엄마는 울타리 저 너머 응달진 그늘을 자꾸만 바라본다. 지나간 시간의 어느 날 속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간간히 건네주는 작은 웅얼거림에 우리는 엄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다.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 몸을 구부려 엄마의 얼굴에 가까이 간다. 따듯함이 남아 있는 손을 잡으며 더 많은 엄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싶다. 창으로 비치는 봄 햇살을 바라보기보다는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걷고 싶다. 우리를 키우면서 농사를 지으시던 너른 버덩을 다정히 걸어보고 싶다.
어머니가 입원을 하셨다. 세계의 뉴스는 코로나 19라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바이러스와 싸우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전염력이 강한 바이러스와 싸우느라 사람과 사람과의 교류가 제한되고 있다.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원망스럽게도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와의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다. 바깥의 상황을 직접 전하지 못하니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어머니는 지식들의 소식을 전해들을 것이다. 온전한 이해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으니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도 이해가 부족할 터이다.
어머니는 자식 자랑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크게 성공해서 남들의 박수를 받을 만큼의 사회적 성공을 거둔 자식은 없지만, 가족들에게 걱정거리를 만들며 사는 자식도 없다. 사소한 이야기라도 자식의 이야기라면 다 잘했다고 박수를 치던 어머니이기에 우리의 모든 일이 이웃사람들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우리 형제자매들은 수시로 부모님의 집을 드나들며 웃음꽃을 피우는 날이 많았다. 나이 들어 온몸에 통증을 안고 살아도 자식들의 먹는 입이 예쁘다면서 텃밭 농사에 놓지 않던 어머니다. 언제나 자식들은 문지방이 닳도록 자주 드나드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어머니인데, 당신이 병원 침대에 누워 버리고나니 우리들의 방문이 닫혀버렸다.
어머니는 통증을 혼자서 참아내고 있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부재를 원망할 것 같다. 가족이란 서로를 보듬고 살아야 하는데 자식인 우리는 본의 아니게 곁을 지키지 못하고 있고, 어머니는 세상에 역병이 창궐해 자식들의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흐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터이니 얼마나 외롭고 서운할 것인가. 통증이 밀려오는 시간에도 아무도 손 잡아주는 이 없는 병실의 침대에 홀로 계실 걸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간병인이 있다하더라도 어둡고 외로운 밤, 어머니의 마음은 우리 자식들을 부르고 있을 것만 같다.
어머니의 생일이 지나갔다. 내일을 알 수 없는 병상에 계신 어머니께 마지막 생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하지만 방문을 하지 못했다. 화원에 가서 빨간 카네이션이 활짝 핀 화분을 샀다.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작은 화분하나 전해주지는 못해도 카네이션을 어머니처럼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동쪽 방향의 베란다 창문은 이른 아침에 해가 든다. 태양이 솟아오르는 시간을 따라 환하게 햇살이 비친다. 카네이션이 좋아할 환경이다. 창문 앞에 작은 탁자를 놓고 화분을 얹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 자리를 잡은 카네이션이 빨간 꽃을 피웠다. 꽃을 바라보면 활짝 웃는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나의 생활을 바라보는 꽃에게 행복한 일상을 보여주고 싶다.
집을 떠나 있는 딸아이에게 가기위해 며칠 간 집을 비워야 한다. 비워야할 시간을 위해 집안 청소를 하고 집에 머물 아들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냉장고를 정리하면서 집을 챙기느라 정신없는 몇 시간이 지나갔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서 서둘렀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 땀을 닦으며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차가 막 출발하려는데,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다. 아들에게 부탁을 해도 되고, 물을 주지 않는다고 시들어버리기야 하겠는가? 하지만, 물을 주지 않고 가면 어머니 같은 꽃이 목마를 것이고 꽃이 싱싱하지 않으면 병상의 어머니까지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미신은 아니지만 어떤 일을 앞두고 자신을 가다듬는 징크스 같은 것이다. 적당한 시간에 물을 먹고 화분의 꽃이 싱싱해야 어머니도 편안할 것이라는 나만의 믿음이다. 집으로 달려가 화분을 촉촉이 적셔주었다.
고속도로를 달린다. 봄날의 고속도로 주변은 화사하다.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지고 노랑과 분홍의 화려한 조화다. 어미닭을 쫓아가는 노란 병아리 같은, 유치원 아이들의 소란스런 나들이 같은, 가는 줄기에 자잘한 꽃송이를 가득 단 꽃들이 화사한 봄 햇살아래서 눈부시다.
이 화사한 봄날에 달리는 차장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가라앉는다. 세상은 이렇게 화려하고 맑고 따뜻함이 용솟음치는데, 코로나19로 생활은 침체되고, 나이 들면서 찾아온 몸의 통증을 참아내기도 버겁다. 마음은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고 싶지만 얼굴마저 볼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화려한 봄날의 한낮이지만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기만 한다. 입원하시기 전의 어머니는 자꾸만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일이 없이 오늘과 어제의 기억들을, 연분홍 새댁시절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서 헤매곤 하셨다. 그 모습을 웃음으로 때로는 나무람으로 거부했지만 그러지 말아야 했다. 이렇게 면회도 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병상을 보내고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후회한다.
딸의 집에 도착했다. 방글방글 웃기 시작하는 어린 손녀의 재롱이 어여쁘다.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옛 어르신들이 오뉴월 하룻볕이 어디냐고 했던가? 세상은 매시간 발전해왔고 그 결과로 먼 곳의 가족들과 실시간 영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대다. 영상으로 아가의 변하는 모습을 매일 보아왔지만, 실제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릴 만큼 자라는 모습이 감격적이다. 아가는, 꽃이 가득한 화사한 봄날이다.
이제 내 시절은 가고 있다. 연둣빛 손녀딸을 바라보는 딸은 이제 엄마로서 피어나는 꽃이다. 여기저기 생겨난 통증을 견디며 딸을 대견함과 염려로 바라보는 나는 화분 속의 꽃일지도 모른다. 식구들에게 화사함은 전해주려면, 누군가가 주는 물을 먹어야 살 수 있는 화분처럼 나는 나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가족의 도움도 받아야하는 입장이 되어간다.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면서 방글방글 웃은 어린 손녀 앞에서, 아가의 웃음 속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봄날의 꽃송이 같이 까르르 웃는 딸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나 역시 행복해지는 시간이다. 웃음소리 속으로 시간이 흐른다. 내게도 저런 꽃송이 같은 시절이 있었었지. 어머니에게 보여드리지 못하는 오늘이 아쉽다. 들려드리지 못하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하늘을 보며 눈을 깜빡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