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의 코로나 19로 인한 집에서의 생활이 외부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가끔은, 지난 시간의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위로 할 때가 있다.
<눈물, 치유의 시간>
요양원 어르신을 위한 시낭송 모임에 갔다. 한 달이면 두 번씩 찾아가는 모임이지만 어른들께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는 읽어 주는 걸 한번 듣고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어쩌다가 내 감정과 일치하는 시어들이 나타날 때 감정을 움직이기도 하지만 총기가 반짝이는 젊은 머리가 아닌데, 사회생활이 어려워서 요양원에 와 계신 어른들인데 읽어주는 시를 한 번 듣고 시에서 감정을 느끼리란 기대는 없었다.
단조로운 요양원의 생활 속에서 간혹 무료할 때도 있으니 바깥사람들의 방문이 반가워 별 말이 없이 그저 왔다가는 줄 알았다. 처음에는 무표정한 대부분의 얼굴들 사이에서 언제 끝나느냐고, 먹을 것 안 주느냐는 질문을 하는 어르신이 있기도 했다. 그러려니 하면서 시를 읽어 나가지만 어쩌면 어르신들이 무척이나 지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어르신께 시를 읽어보라고 원고를 드리니까 처음에는 싫다고 손사래를 치던 몇 분이 그걸 보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발음도 잘 되지 않고 숨이 찬 상태에서 읽어내는 일이라 시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용기에 박수를 쳐 드렸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진행 방식이 달라졌다. 모든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몇 분을 모아서 만나기로 했다. 아주 짧고 이해가 쉬운 시를 큰 글씨로 복사한 시를 어르신들이 들고 나오셨다. 요양원 복지사가 준비한 시였다. 회원들이 준비한 시는 우리가 읽고 요양원측에서 준비한 시는 어르신들이 읽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지난 시절 이야기도 들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같은 내용을 반복하지만 자신의 젊은 날 이야기를 아주 잘하셨다. 요양원에서 어른들끼리는 의사소통도 잘 되지 않으니 그런 옛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는지 고개를 끄떡이며 맞장구를 쳐 주는 우리 앞에서는 이야기가 끝이 없다. 이제 검사를 받거나 방에 가서 쉬어야 되는 시간이 왔지만 이야기와 웃음은 끝이 없다. 어르신들은 우리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가족에 관한 시를 읽어 달라는 복지사의 주문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한 번도 목욕탕에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내용의 시가 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시인은 철이 들면서 부끄러웠지만 일곱 살 대신 다섯 살이라고 속이면서 엄마와 누이들과 가기 싫은 여탕엘 다녔다. 목욕탕에 데려가지 않는 아버질 무척 원망하면서 함께 목욕탕에 온 부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시인은 어른이 되었고, 나이가 많아진 아버지가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뒤에 보니 아버지의 등에는 지게자국의 흉터가 있더란 내용이었다.
시를 읽고 나니 옆의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참 잘 읽으시네요. 아버지를 보는 아들 맘이구먼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한번 읽었을 뿐인데 내용을 파악하는 힘이나 그 집중력에 놀랐다. 거기다가 칭찬까지 하는 여유 있는 마음이라니. 시어머님은 내게 한 번도 칭찬을 해 주지 않았다. 그 설움과 한을 어머님 돌아가신 지금도 나는 안고 산다. 시를 참 잘 읽는다는 칭찬을 내 어머님이 아닌 다른 어머님에게 들으면서 그동안 칭찬을 듣고 싶었던 한이 풀리는 것 같다.
뭉클한 가슴으로 고개를 드니 맞은편에 앉아 말씀도 없이 무표정하던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고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무료한 요양원의 생활에,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몸과 마음이 병든 어르신들에게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고 눈물을 드리다니. 하지만 놀랍다. 우리가 읽어 주는 시가 그분들의 잠자는 감성을 깨우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맘이라고 시를 이해하듯이, 할아버지는 그 시를 들으면서 아들을 생각하거나 지난 시절의 아버지 역할에 대해 생각하시는지도 모른다.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일에는 장애를 느끼지만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시를 읽고 나니 칭찬을 해 주시던 할머니에게서 시어머님에게 받았던 서러움을 씻어내는 것처럼, 할아버지는 내가 읽어드린 시에서 지난 시절을 아픔을 눈물로 씻어 내었으면 좋겠다. 시를 잘 쓰지 못하는 내가 시를 읽으면서 서러움을 잊어 가듯이 시를 잘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이 우리가 읽어 드리는 시를 들으면서 지난 시간의 한을 씻어 내기를 바란다.
창밖을 내다보니 푸른 치악산이 눈앞에 가득하다. 나무와 바람과 숲 내음이 가득 전해 오는 것 같다. 비록 유리 창 너머로 내려다볼 뿐이지만 산의 경치가 참 좋다. 그 속에서 시를 읽고 듣는 시간. 어르신과 나는 시 한 편에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었다. 시어른에게는 해 드리지 못했던, 서러운 감정만 안고 살았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서운함이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감정이 앞서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하면서.
지게을 지고 산 세월동안의 고생이 등에 남았고 그 짐을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시인의 아버지처럼, 우리 시어머니도 지난 시간의 한이 뭉쳐서 사랑의 표현을 숨기고 살았을 것이다. 앞에 앉아 말없이 눈물을 훔치는 어르신처럼 자신의 한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감추는 일에만 몰두해서 며느리에게 사랑의 표현마저 감추었을 시어머니였다고 생각하며 나를 달랜다. 이제는 확인할 시간이 없어졌으나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눈물이 난다.
미처 몰랐던 어르신들의 감정을 몰래 지켜보면서, 나 역시 노인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어르신을 위로했다기보다는, 내가 어르신에게서 위로를 받는 시간이었다. 봉사가 가져다준 귀한 선물이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 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