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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Nov 11. 2023

바람

 찬바람이 휙 분다. 친구로부터 지금 곧 도착하니 집 앞의 도로변에 나와 있으라는 전화를 받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읽던 책을 덮어두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친구가 나를 만나기 위해 집 앞까지 와 주겠다니 그녀의 수고가 고마워 읽고 싶은 책을 덮을 수밖에 없다. 나를 찾아오는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배려이기에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려 했던 예정했던 시간을 접었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로 빗방울이 후드득 거린다. 찌푸린 하늘은 바람을 가득 안고 있다. 옷깃을 여미고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고 섰다. 길 가의 찻집도 아니고 의자가 놓여있는 여유로운 길도 아니다. 옆으로 차들이 쌩쌩 거리며 지나가는 길이다. 길 가에 서 있으니 더러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의식하게 된다. 도로변에 마냥 서 있는 모습이 그들의 눈에 어찌 보일까 하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물론 그들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거나, 내가 그들의 관심을 끌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옷깃을 바람이 날리고 서 있는 내 모습이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기다려도 친구는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기다리고만 있으니 당연히 시간이 더디 간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곧 도착한다던 전화를 해 놓고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읽다가 던져두고 온 책이 마음 쓰인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이 예정되어 있는 책이다. 오늘은 다 읽으리라 마음먹으면서 집중하고 있었는데 만나자는 전화에 덮은 책을 읽지 못한 시간이 아깝다. 이만큼의 시간이면 몇 페이지는 더 읽었을 텐데, 집중하고 책을 봤으면 많은 생각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은근히 짜증을 몰고 온다.


이미 오래전이지만, 한동안 국내에 와서 사는 외국인들이 출연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텔레비전 방송을 재미있게 보았던 적이 있다. 소도시에서만 태어나고 자라 온 나로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좁다. 다양한 경험이 없기에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좁은 소견으로 내가 경험한 만큼만 생각하고 결론짓는다. 가령, 자장면이나 통닭이나 피자처럼 배달을 해 먹는 음식이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 어느 때나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먹을 수 있었기에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기들 나라에는 배달음식이 없다고 하는 출연자들도 있었다. 조금 늦는다 싶으면 왜 안 올까 기다리며 신속배달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한국의 배달 음식을 특이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빠른 배달이 놀라고 신기해하는 출연자의 이야기가 오히려 신기했다.


외국인들은 애매한 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한번 만나서 밥 먹자.” 거나 “며칠 있다가 연락할 게.”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게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헷갈린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말을 자주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시간과 날짜에 대한 언급이 없이 뭉뚱그려서 말한다. “한 번 만나자.”거나 “연락할게.”라고 말하고는 그 약속은 내 사정에 의해 연기되기도 하고 내 필요에 의해 앞 당겨지기도 한다. 상대방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나의 입장에 의해 지켜지는 약속이다. 그런 말 때문에 외국인들이 당황하고 황당해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앞으로는 가까운 친구라 하더라도 약속을 할 때는 시간을 정확하게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살아졌지만 오래전에는 ‘코리언 타임’이라는 말이 있었다. 외국인이 볼 때 한국 사람은 약속시간 보다 약속장소에 늦게 나온다는 말에서 유래한 단어다. 산업이 발달하기 전의 어른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시계가 없이 해의 움직임에 따라 하루를 보내기에 익숙했던 우리나라 사람과는 달리 서양인들은 시계의 시간에 맞추어 사는 사람들이다. 또 언어에서 오는 차이로 인해 약속시간에 대한 개념이 달랐는지도 모른다. 물론 약속시간은 잘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생활 방식이 달랐고 시계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생겨난 단어가 코리언 타임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 집에 시계가 없었다. 할머니가 사시는 바로 옆집인 큰댁의 안방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었다. 하루 종일 뚝딱거리면서 시계추가 움직이고 정시가 되면 시침이 머무는 자리의 숫자만큼 땡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댁과 달리 시계가 없는 우리 집의 아침은 닭장 속의 닭의 울음소리로 시작되었다. 물론 계절에 따라 해가 뜨는 시간이 달랐다. 일정한 시간을 맞추기보다는 날이 밝으면 일어나고 해가 질 무렵이면 저녁을 먹었다. 자연과 함께 하루의 시간이 조절되었던 시절이다. 12시가 되면 사이렌이 울려 정오가 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 시절의 약속은 구체적인 시간보다는 식전에 만나고 점심때 만나고 해 질 녘에 만나고 했던 것 같다. 주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으니 자연과 더불어서 그 속에서 시간을 대충 어림잡으면서 살았다.


지금은 시계가 흔한 시대다. 출퇴근 시간이나 차나 비행기를 타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하루의 일과도 어느 정도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모든 것이 숫자와 연결되는 일상에서 약속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때로는 시간표대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재산이 될 수 있는 시대다. 집에 걸린 시계에서 손목에 차던 시계로, 이제는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면서 수시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약속시간이 늦어진다면 공중전화를 찾아 뛰던 시대도 이미 지났다. 차 안에서 또는 걸어가면서, 일을 하면서도 약속시간이 늦어진다면 전화를 걸어서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꾸만, 읽다 덮어둔 책장이 눈에 밟힌다. 책을 읽어야 하고 읽은 책에 대해 토론을 하고 토론을 위한 메모의 시간도 필요하다. 주부이지만 이런저런 욕심으로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시간 사이사이에는 식구들 도와야 하는 일도 있으니 몇 분의 시간이 남들에게는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내게는 아까운 시간이다.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의 시간표를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종종걸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내가 마냥 길에 서 있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 사이에서 나는 전화를 걸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것도 모자라 전화를 잘 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문자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학창 시절에 받은 전화 예절에 대한 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볼 수 없는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의 상황이 어떤 지도 모르고 내 필요에 의해 아무 때나 전화하기가 부담스럽다. 책을 읽거나 어떤 일에 집중해 있는 동안이나 강의 듣는 걸 좋아하는데  강의를 듣는 도중에 걸려오는 전화도 부담스럽다. 전화를 건 누군가가 하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도 길게 들어야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면 하고 있던 일에 대한 생각들이 저만치 달아나 난감해지는 일이 자주 있다. 그런 핑계로 전화기 사용을 잘하지 않는다.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손에 든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린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언제 오느냐고, 어디까지 왔느냐고 물어볼까? 운전 중일지도 모르는데 전화를 해도 되나? 망설이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망설이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친구는, 벌써 나왔느냐고 알았다고 이제 출발하겠다고 말하며 웃는다. 곧 도착한다더니 아직 출발도 안 했다고? 순간, 마음이 멍해진다.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다. 후드득거리던 빗방울에 따라 우산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찬바람을 막으려 옷깃을 여미는 사이 시간이 저만치 달아난다. 아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다. 기다림 사이로 찬바람이 불고 있다. 원하지 않았지만 바람을 맞고 서 있다. 친구가 내 시간을 아껴주었으면 좋겠다. 내 바람은 친구가 빨리 오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부는 길목에 서서, 나는 정말 바람맞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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