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넷 Dec 24. 2019

스물여섯, 첫 회사 송년회의 유산.

그 포토월은 그냥 거기 있는 게 아니야.

12월. 흥겨운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반가운 지인들과 송년회를 즐기는 이 즈음, 난 이따금 6년 전 그때를 마주한다. 지금은 술안주로 제격인 내 첫 회사의 송년회는 당시 스물여섯 내 인생의 가장 큰 충격이자 시련이었다. 출근길, 고장 난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보며 뛰어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게 그즈음이었으니까.


당시 나는 중견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했다. 홍보팀은 기업의 사내 커뮤니케이션도 주관하는 만큼 기업의 주요 행사를 진두지휘 한다. 덕분에 생전 처음 300여 명의 전 직원을 대상으로 회사 송년회를 준비하게 됐다.


기업의 송년회는 지인들과 갖는 송년회와 같다면 같고 다르다면 달랐다. 


으레 송년회를 가득 채우는 추억팔이는 회사의 연간 결산과 공치사로 대체됐고 우리의 흥을 배가시키던 술자리 게임은 구태의연한 장기자랑으로 교체된 정도라 할까. 우리들의 송년회와 회사의 송년회는 그렇게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달랐다.


가장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건 회사의 송년회는 ‘담당자’와 ‘책임자’가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 책임을 묻고 피하기 위해 준비된 날카롭게 수놓은 액션플랜들이 행사의 주관자들을 움직이게 했다. 행사의 주인공인 직원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트루먼 쇼의 세트장을 만드는 것 같다고나 할까.


송년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11월 말,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높은 자리의 ‘그분’의 피드백이 보고서에 달렸다.


‘온 직원이 한데 모여 소통하고 회사의 방향성을 듣는 기회는 적으니,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하거라.’


나는  그 한 줄이 내 회사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것이라 추측 혹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분’의 절대적인 피드백이 온 뒤, 송년회에 대한 각종 보고서 및 액션플랜은 모든 업무의 최우선으로 떠올랐다. 뿐만 인가, 디테일에 목숨을 걸며 다독인 불안감은 리허설에서 단상의 위치가 두 발자국 정도만 뒤로 가도 고성이 터져 나올 만큼 농익어 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탈탈 털려 가고 있었다.


1년은 채우고 그만두는 것이 그 당시 내 가장 큰 목표였기에 이를 악 물었지만, 이런 시련을 겪어 내야만 1년이 채워진다는 것에 억장이 무너졌다. 어느 날이었다. 모든 직원들에게 전하는 교육의 메시지를 담은 사내 영상 보고를 새벽까지 마치고 퇴근해 침대에 쓰러져 자던 날.


새벽 4시, 휴대폰이 울렸다. 낯익은 사투리를 구사하는 영상 팀장이 회사인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는 듯 속삭이며 물었다.


“르넷아, 자는 데 미안한데... 15번 씬 이미지 소스 찾아 놓은 거 맞아? 이거 아침 일찍 디자인팀에 넘겨야 영상팀에서 그래픽 입혀줄 텐데, 못 찾겠어서... “


꿈인가 싶어 휴대폰과 시계를 번갈아가며 어버버 하던 찰나, 옆에서 작게 구시렁거리던 총책임 팀장이 전화를 바꿔 받았다.


“르넷, 이거 굉장히 중요한 영상인데 이걸 이렇게 처리해놓고 가면 어떡해요? 300명이 함께 볼 영상이니 이건 적어도 300분의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에요. 출근하면 제 자리에서 이야기 좀 해요”


늦은 시간 전화한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안다는 듯한 그녀의 속삭임은 되려 내 정신은 번쩍 들게 했다.


다음날, 좀 더 늦게 출근해도 되었지만 8시 정시 출근을 위해 눈을 떴다. 아니, 떠졌다는 게 맞겠다. 관성의 힘으로 출근하던 길 지하철 환승구에서 방송이 들렸다.


"지하철 스크린 도어 고장으로 열차가 5분 정도 지연될 예정입니다."


평소 같으면 지하철 지연 증명서를 떼가야 하나 하는 불안함에 발을 굴렀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마음이 편해졌다.


'열차가 왔으면 좋겠다. 사람들 밀치고 가면 저 문 틈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하는 동안 스크린 도어는 고쳐졌고 나는 다시 관성에 몸을 맡겼다. 5분 남짓의 시간, 난 죽고 싶었던 걸까.


여차저차 몇 주 후 송년회는 무사히 진행됐다. 그리고 6년이 지난 12월, 난 회사의 송년회에 감사한다.


견뎌낸 그 해 송년회에서 나는 알게 됐으니까.


그 포토월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그 먹을 게 없다고 투덜대는 뷔페 음식도,

촌스럽게 보이는 그 영상도, 재미없고 작위적이기까지 한 장기자랑도

누군가는 잠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견뎌낸 일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아니까.


그리고 나와 그들이 관성의 힘으로 버텨냈을지 모르는 일년을 자축하는 시간이라는 걸 나는 아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들어는 봤나, 대리병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