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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Jan 12. 2022

에밀리는 서울에 없지만, 그래도.

Dear 2022년 AE(Almost everything), 같이.

취업준비 시절, 선배와의 대화에서 국내 주요 외국계 PR 기업을 다니는 선배를 만났다. 한 시간 남짓한 강연 속에서 뇌리에 박힌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AE가 무엇의 약자인지 아시나요?" 

대답 안 하기로 유명한 여대답게 답을 알면서도 우리는 소곤소곤 모드로 'Account Executive' 하며 두리번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강단에 서있는 선배가 웃으며 스스로 답했죠. 


"Account Executive요? 아니에요. Almost Everything의 약자랍니다." 


몇몇은 웃고, 몇몇은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을 짓고 또 몇몇은 무반응이던 그 드립. AE의 약자. 나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던 부류였는데, 썩 기분 좋은 농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짬 천국'이라는 말인 것 같아서였죠. 


그렇게 선배의 조언 아닌 조언을 흘려듣고 인하우스 홍보팀에서 근무 후, 호기롭게 에이전시로 건너온 지 8년 차. 10년 전 그 선배의 쓴웃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되려 미안한 마음이 샘솟는 요즘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나는 후배들이 전문성을 기르고 'PR'이라는 전문분야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여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 누군가 홍보회사 직원들의 주말 출근과 야근을 당연시되지 않도록 Hourly Billing이라는 것을 적용했던 것처럼. 어느 누군가가 홍보효과는 원래 수치화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광고 단가표 기반의 가중치를 적용하는 KPI 체계를 만든 것처럼. 나를 포함한 AE들이 제대로 인정받고 일할 수 있는 업계를 만드는데 '1 정도의 도움'은 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다시 브런치를 열게 만들었습니다.




에밀리는 없지만, 그래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업력이 막 30년 되는 원로도, 업계에 지대한 영향력이 있는 인물도 아닙니다. 그저 이제 막 10년 차가 된 조금 더 일한 시니어 수준의 Almost Everything 일뿐. 그런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관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무자도 아닌 어중간한 제가 잘할 수 있는 일. 


그건 저는 AE로서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전하는 것인 듯 했습니다. 팀장 딱지를 붙인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실무에 가깝고, 팀장이 되긴 했으니 에이전시 중간관리자로서 실무자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PR을 시작하는 AE가 참고할 수 있는 업무 FAQ 제공. 어차피 매일 하는 일의 큰 부분은 후배들의 민원 처리이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모니터 앞에 앉았습니다.   


주니어 시절 PR 에이전시로 이직 후, 입버릇처럼 ‘업무 매뉴얼이 있으면 좋겠다.’ 고 말하곤 했습니다. 촘촘한 디테일과 상황에 따른 업무 판단이 당락을 결정하곤 하는 PR일의 특성상 업무 역량 교육이 도제식으로 이뤄져 왔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서 업무를 가르쳐야 하는 사수도, 배워야 하는 주니어도 많은 시간과 감정을 투자하게 되는데 이는 생산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쿡방을 보며, 요리를 따라 하듯이. 생활 속 노하우를 전해주는 인플루언서의 하우투 콘텐츠처럼. 이 일을 시작하는 분들이 시작의 불안함보다는 설렘에 집중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만하면 어중간한 초보 팀장이 할 수 있는 일은 해내는 것이라 낙심할 수 있기를. 

 

에밀리는 서울에 없어요. 그래도 이 일이 그만한 재미는 있는 일이에요. 내가 전하는 콘텐츠가 기어이 재생 버튼을 누르게 하는 넷플릭스의 1분 미리보기가 되어 더 다양한 이들이 PR라이프에 로그인한다면 그뿐인 것 같아요.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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