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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Aug 30. 2021

을지로 3가 인쇄소, 협신 기획 사장 퇴사합니다.

아빠의 첫째, 35살 을지로 인쇄소를 보내며

"아빠 인쇄소 접는데, 8월까지 사무실 정리한다네."

엄마의 걱정 묻은 목소리가 휴대폰으로 전해졌다. 입으로는 몇 백번을 한 은퇴를 결심한 모양새였다.


아빠의 회사는 시중 A은행 직원들의 명함을 공급하는 인쇄소다. 내가 아는 것만 10년이 지났으니 꽤나 오랫동안 이어온 거래처다. 지난 월요일 본사에 방문해 더 이상 납품이 어렵다고 이야기했다나 사실상 폐업 수순인 거다. 아빠의 인쇄소는 A은행이 유일하다 싶은 거래처니까.


꽤 큰 규모의 은행이라 사실 A은행 하나로도 인쇄소는 운영이 가능했다. 1인 회사였으니까.


아빠의 인쇄소는 IMF 이전, 아빠를 포함 5명 정도의 직원이 있었다. 어릴 적 엄마와 갔던 인쇄소에는 경리 언니가 나를 반겨주었고 공장 삼촌과 까까를 사 먹으러 갔던 기억이 있으니 꽤나 중소기업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누구나 힘들었던 IMF는 가진 거라곤 인쇄기술 밖에 없던 37살 어린 사장에게는 더 가혹했나 보다. 주요 거래처였던 은행들이 통폐합되자 거래처가 줄고 직원들을 내보내야 했다. 결국 홀로 영업, 제작, 납품까지 해내며 회사를 유지했다. 그 와중에 을지로 재개발로 사무실은 여기저기 옮겨다니기를 연거푸. 온 세상이 나가떨어지라고 아빠의 인쇄소를 밀어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인쇄소 책상 서랍 속 노트를 꺼내 이렇게 적었나 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틴다. 아이들과 아내가 있다. 아직은 버텨야 한다. '


열아홉 수능이 끝나고 아빠의 회사에서 알바를 했다. 말이 알 바지, 몇 통 없는 거래처 전화를 받고 납품 예정인 물품을 패키징 하는 정도의 단순 업무를 하며 웹툰을 보는 식이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알바 취업에 아빠가 간접적이나마 사회 경험 하라며 불러준, 그런 일자리였다.


출근 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까, 더 이상 볼 웹툰도 TV도 없던 나는 아빠를 기다리다 책상 서랍을 하나 둘 열었다. 그렇게 아빠는 97년 어느 겨울날 가족 몰래 다잡던 마음을 딸에게 들켰다. 당시에는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아빠가 힘들었나 보네' 정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고 가끔 힘에 부친 일상이 찾아올 때 아빠의 그 노트가 눈에 아른거리는 건 아빠가 내게 정말 주고 싶던 유산이었을까.


아빠는 내가 고등학생 무렵 작은 노래방을 운영했다. 낮에는 인쇄소를 밤에는 노래방을 운영하는 식이었다. 덕분에 아빠는 지금도 눈 밑 다크서클이 짙다. 판다를 닮아간다며 철없이 놀리는 딸내미가 그에게는 희망이었을지 부담이었을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아빠는 여러 가지 겸업을 했지만 인쇄소는 놓지 않았다. 인쇄소는 사실 이제 더 이상 큰돈을 안겨주는 수입처가 아니었다. 네이버 검색만 해도 더 낮은 가격으로 당일 제작을 해준다는 업체가 스크롤을 내리기 무섭게 생겨났다.


아빠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이유는 겸업으로 시작한 다른 가게가 자리를 잡아왔다는 거다. 아빠는 직감으로 그리고 30년이 넘는 경영자의 혜안으로 이제 그만 인쇄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애초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인쇄소를 근 10년 가까이 놓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는 말했다.


' 을지로 가면 너희 아빠 모르는 사람이 없고, 너희 아빠를 최고로 쳐주는데. 그걸 손에서 놓기 쉽지 않지. 이래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거야.'


본인 몸을 혹사하며 인쇄소를 놓지 못하는 남편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아빠의 고집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어느 정도 공감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본인 삶의 반 이상을 보낸 터전을 어찌 그리 쉽게 정리하겠는가. 을지로 인쇄소는 아빠의 생계수단이기보다 정체성이 된 셈이었다.


"아빠가 싱숭생숭할 거야. 네가 전화라도 한 번 해봐."

통화 속 짧은 침묵에 스쳐가는 내 많은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걸까, 엄마는 내게 전화를 끊고 아빠에게 격려 전화를 할 것을 권했다. 지체 없이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한참이 흐른 뒤 연결된 통화에서 나는 안도했다. 물론 아빠의 아쉬움은 느껴졌지만 그보다 고마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이걸로 너네 대학 다 보내고 집 사고 다 했으니까, 됐지.
할 만큼 한 거지."

뻔한 드라마에서 듣던 대사를 아빠에게서 들었는데 마음이 시큰했다. 30년 넘게 '가장'으로 '사장'으로 산 다는 건 얼마만큼의 삶의 무게를 이고 가는 걸까. 어쩌면 협신 기획 인쇄소는 아빠의 무게를 함께 져준 존재였던 건 아닐까. 그래서 본인=인쇄소라고 믿고 한 업을 30년 넘게 해왔을 것이다.


아빠는 앞으로 자식들이 주는 돈으로 살겠다며 농담으로 전화를 끊었다. 조만간 딸과 함께 을지로 또는 청계천을 지나가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온다면, 이야기해주어야겠다. 이곳은 할아버지가 네가 살아온 시간보다 많은 시간 동안 희로애락을 느낀 곳이라고. 훗날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처럼 당당하지만 즐겁게 버텨나가기를 기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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