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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넷 Dec 21. 2020

녹슨 삶의 안테나를 다시 켜려면

타요 장난감의 뒷문이 열린 다는 걸 몰랐다.

지난 주말, 여느 때처럼 코로나를 탓하며 아이와 집에서 주말을 보냈다. 장난감 자동차를 유독 좋아하는 아이는 항상 본인이 발로 구르는 자동차를 타거나 장난감 자동차를 매트에 구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저녁, 남편이 갑자기 타요 장난감을 가져오더니 말했다.


"이거 뒷 문 열리는 거 알아?"

무슨 말인가 해서, 장난감을 들여다보았다. 타요의 뒷문이 남편의 손가락에 따라 수동으로 열리고 닫히고 있었다. 그리고는 다른 자동차를 가지고 오더니 이 타요는 문은 안열리리는데, 안에 좌석이 실제 버스처럼 만들어져 있다고 하며 나에게 장난감을 보여줬다. 정말 그랬다. 1인석으로 앞좌석이 차있고 2인석 뒷좌석 그리고 5인석 맨 끝 좌석까지 정성스레 만들어져 있었다.


 


시답잖은 이야기일 수 있건만,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저 '타요 자동차'를 가지고 아이와 일 년을 넘게 놀았다. 저 타요를 몇 번을 만지고 밀고 치우고 했단 말인가. 그런데, 저 타요의 뒷 문이 열리는지 실내 공간에 좌석을 저렇게 구현해놓았는지 알지 못했다. 들여다보지 않았으니까. 그저 버스 장난감이라는 규정과 기능에 매몰되어 저 녀석을 들여다볼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남편의 발견에 괜스레 시니컬해졌다. 뒷문이 열리는 건 몰랐는데, 저 타요가 좌석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며 궁색한 변명을 하고는 주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싱크대 앞에 서서 거실을 내려다본다. 일상 속 풍경인데, 괜히 낯설게 느껴져 멍해진 나를 아이가 잡아끈다. 레드썬, 인셉션의 팽이가 멈춘 느낌이다.


대학시절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교양강의에서 '금붕어의 눈썹'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사람들의 편견과 무조건적인 전승이 우리 머릿속 금붕어에 눈썹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난 그 이야기가 매우 흥미로웠는데, 실제로 취미가 없어 의식의 흐름대로 그린 내 결과물 속의 금붕어는 눈썹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이 금붕어를 그려볼라길래 생각 없이 펜을 놀리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느낌이었다.


편견과 무조건적인 전승이라. 손바닥만 한 장난감 자동차의 뒷문이 열릴 거라는 일말의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손안에 있는 실체를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니. 주어진 하루 일과를 쳐내며 실제 타요버스 안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다 보니 객체를 제대로 보는 눈도 시각도 무뎌진 내가 보였다. 나는 일상 속 얼마나 많은 장난감 타요를 흘려보냈을까. 괜스레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에 죄스러워졌다. 편견과 무조건적인 전승으로 얼룩진 내 삶을 방치하게 둔 망가진 내 삶의 안테나가 그제야 허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삶의 안테나가 망가지니 성장이 멈췄다.


누가 한 말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사수 중 한 명이 이따금씩 말해주었던 것 같다. '삶의 안테나를 켜야 한다'라고. 고객사 혹은 프로젝트 관련한 아이디어를 일상생활 속에서 영감을 얻고 발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식당에서 발견한 프로모션 문구, 미팅 길 택시 기사님과 주고받은 잡담 속에서도 퍼블리시티 키워드를 발굴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온 앤 오프가 명확한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말을 듣거나 한다면 일에 매몰된 사람이라며 혀를 끌끌 찼겠지만, 그때만 해도 숨겨진 비기(祕器)를 전수받은 듯했다. 사수의 충고대로 일상 속 하루하루를 순간순간 들여다보려 했고  몇 번은 좋은 아이템을 찾거나 키워드를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삶이 풍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거다. 생활 속 발견을 이어나가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상이란 남들보다 삶을 세 배쯤 만끽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8년이 지난 지금 내 삶의 안테나는 어떠한가. 어렸을 적 외할머니댁에 가면 몇 번이고 '툭툭' 쳐야 겨우 신호를 잡던 TV 안테나 같다. 가끔 신호를 잡아내다가도 다시금 회색 줄이 올라오며 지지직 거리고 괜찮아지기를 반복하던 안테나. 결국은 TV를 끄고 사촌언니들과 공기놀이를 하거나 시시콜콜 이야기를 하게 만들던 그 안테나. 지금 내 삶의 안테나가 그것과 같다.


때때로 의도적으로 삶의 안테나를 켜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억지로 켜보기도 하지만, 어느새 꺼져있고 결국은 자책에 지쳐 절전모드로 되어 버리는 도돌이표. 내 현실이다. 이런 악순은 최근 내 업무역량 중 가장 심각한 문제와도 맞닿아있는데 바로 '궁금한 것이 없다'는 거다.


"아니, 안 궁금해?"


내 상사가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다. 제안서를 쓰거나 고객사를 위한 플랜을 쓸 때 상사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안하지 않는 나와 동료들에게 하는 질책이다. 추가 마진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함이기도 하고 고객사에게 현 PR의  확장성과 담당인력들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실 이런 기획 업무를 진행해야 업계 트렌드를 비롯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공부가 이뤄진다. 한데, 실무자 입장에서는 꽤나 번거롭고 업무가 가중되는 셈인지라 쏟아지는 업무를 우선 진행하고 우선순위를 뒤로 미루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고객사가 요구한 일을 쳐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하루하루 아니던가.

 

특히 요즘 이 말이 유독 불편했던 이유는 상사의 물음에 답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궁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겠다. 문제의식이 제로인 셈이다. 일상 속에서도 안테나를 활짝 켜고 업무 관련 아이디어를 찾아 헤매던 나였건만, 이제는 더 이상 매체나 마케팅 사례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난 궁금증을 찾기 힘들었다. 의무감 반, 부채감 반으로 공부를 하고 익혀갈 뿐이었다. 상사는 도대체 왜 리에게 자꾸 궁금하기를 요구하는 걸까.


궁금증이 생겨야 사람은 움직이니까.  


얼마 전 30개월 조카와 시간을 보내게 된 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보통 36개월 전후의  아이들에게는 '왜병'이 찾아온다. '왜병'은 무슨 말만 하면 '왜'냐고 되묻는 증상이 동반되는데 이에 대답하는 보호자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왜' 도돌이표에서 빡침을 경험할 수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조카: 이거(장난감 자동차) 어디?

나: 여기 주차장.

조카: 왜 주차장?

나: 주차장은 자동차 집이니까.

조카: 왜 집에 (있어)?

나: 자동차도 쉬어야 하니까..

조카: 왜?

나:.....................

조카: 집 쉬어? 왜?

나:....................


결국 질문에 질문으로 응하다 말을 돌려야 끝나는 이 왜병을 경험하니 스스로 세상을 '왜'라는 관점으로 본 적이 없구나 싶었다. 조카의 맥락 없는 질문 폭격과 영혼 없는 대답이었지만, 사실상 주어진 하루에 순응하고 '그러려니' 하는 태도로 삶을 살아낼 뿐이었다.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무엇을 궁금해야 할지 이따금씩 궁금할 때가 있곤 했지만 그건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부채감의 산물이었지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하는 본능적인 궁금증은 아니었다. 이렇게 나는 성장의 동력이 동나버린 걸까 싶다가 문득 조카와의 대화에서 격려를 얻었다. 조카와 대화하면서 든 바로 그 생각.


'얘는 '왜'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건가..?'

사실 36개월이 안된 조카가 '왜'라는 말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겠는가. 그냥 그 말을 하면 어른이 무언가 계속 말하게 되고 대화하며 소통하게 되니 조카의 기부니가 좋아지고 그렇게 새로운 것을 알아나가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나도 그냥 조카처럼 일단 '왜'를 내뱉고 나면 어찌 됐든 성장의 씨앗을 키워나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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