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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성, 백조, 그리고 에든버러

by 병 밖을 나온 루기
대영 박물관! 그 유명한!! 그렇지만 박물관이랑 미술관은 영 별로다. 차라리 가고 싶었던 자연사 박물관을 갈 걸 그랬나. 지오다노 입고 있는 사람 찍어서 이집트관을 물었더니 레제스터스톤이랑 람세스 상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옥스퍼드 갈랬는데, 윈저로 가라고 조언도 해주었다.

이곳에서 한국인도 꽤 만났다.(이제껏 나는 눈에 찌짐을 붙이고 다녔나 보다) 오래간만에 얘기가 통하는 여자분 두 명도 만났다. 그러다 보니 대영 박물관은 오래 못 보고 나와서 길거리를 헤매다가 코벤트 가든에 도착!

같이 있으니까 더 불편하고,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한 것 같다.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도 만나고 싶더니 오늘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니 한국에서 내가 신경 쓰던 것들, 옷차림이나 첫인상 따위를 신경 쓰고 있는 나 자신이 보였다. 이건 아니다 싶네. 정말 그냥 아무도 없는 호랑말코들만 가득한 호스텔에서 그들의 문화를 느끼고 즐기는 것도 퍽 괜찮은 듯하다. 내 비록 영어는 안 되지만 말이야.

박물관에서 만난 언니 두 명과 맘마미아 극장에서 볼 수 있음 보기로 하고 악수하고 헤어졌다.

사진과 정말 똑같이 생긴 코벤트 가든에서 조금은 슬픈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왠지 모를 눈물이 고이는 이 순간이 나쁘지 않다. 내일이면 런던을 떠나는데, 많이 아쉬울 것 같다. 우리 집 bayswater & 런던. 내가 돌아다닌 곳들 모두가.

혼자인 것에 적응한 나는 이제 이런 것 모두를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일기를 쓰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파란 눈 노란 머리가 가득한 이곳은 정말로 유럽이구나. 나는 뮤지컬을 보고 박물관, 미술관을 구경하는 것보다 정말 이런 이들의 길거리 문화 그리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양복에 운동화를 신고, 거리에서 음식을 먹고(2002년 한국에서는 양복에는 구두를 신었나 봅니다) 이 거리의 악사들에게 1파운드 정도 선사하고픈데 동전이 없네.


윈저성

윈저성

회색 하늘 아래였지만 오랜 세월을 머금은 벽돌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흐린 날을 대하는 평소의 나라면

"아, 날씨가 좋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겠지만, 이 풍경만큼은 비가 와도 참 좋았다.


근위병과 함께 사진까지 찍고서 성을 나와 내려오는 길에 백조들을 또 만났다. 이런 풍경은 항상 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귀에는 흥겨운 선율의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리듬이 실린 발걸음은 댄스가 되고 어깨는 저절로 들썩이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라라랜드'의 주인공쯤 된 기분이랄까.



그저 이런 풍경도 좋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글을 적는 지금, 사진을 뒤적이다 보면 풍경 사진이 참 많다. 빨간 벽돌집, 멀리 보이는 윈저성, 흐린 날씨의 길을 밝히기 시작하는 노란 불빛, 고르뎅 재킷을 입고 길을 걷는 사람.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흔한 풍경이라도 여행자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붙잡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에든버러로 향하는 이층 버스

런던에서 4일을 머물면서 근위병 교대식도 못 보고 떠나게 되었다.


오늘의 미션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로 향하는 야간 버스표를 구매하는 거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I want to go to the 에든버러. One person please"라고 말해야겠다. 떨리는 마음으로 연습한 말을 뱉고서 표를 구입했다. 다른 사람은 어찌 말하나 궁금해서 잠시 매표소 옆을 서성였다. "에든버러 원 티켓." 그 외국인이 플리즈를 붙였던가 안 붙였던가. 머리를 띵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저리도 간단한 거였다니! 다음엔 나도 꼭 저렇게 말하고 구매하리라 다짐하며.


런던에서 밤새 달려 에든버러로 데려다줄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굉장히 컸다. 내부에 계단도 있고 화장실도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밤새 8시간을 지내야 했지만 그건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나는 이십대니까!(40대인 지금이라면 꽤 힘든 일정일 것 같은데 그때는 이게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걸 보면 젊긴 젊었다)


야간 버스에 앉아서 자야 하는 것보다 더 힘든 점은, 솔직히 말하자면 암내였다. 닫힌 공간에 가득했던 외국인 특유의 냄새가 나를 공격했다. 창문을 열 수도 없었기에 나의 후각이 무뎌져서 익숙해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어수선한 소리에 억지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승객 모두가 내리는 듯했다. 목적지에 도착했나 보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나도 사람들을 따라 내렸다. 승객을 내려준 버스는 이내 정류장을 떠났다. 아직 잠이 덜 깬 나를 제외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흩어졌다. 정류장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잠시 쉬다가 정류장의 표지판을 올려다보았다.

"Glasgow"

나는 분명 에든버러행 버스를 탔는데, 글로스고우? 여기가 어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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