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글래스고와 에든버러를 다녀온 기억은 찢겨 나간 여행일기와 함께 많이 날아가버렸다. 일기장은 왜 찢겼을까요? 이 이야기보따리를 끌러도 되나 고민했는데, 풀어보기로 했다.
런던 숙소 첫날 나에게 말을 걸어온 외국인이 한 명 있었다. 나의 짧은 영어로 대화는 당연히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전자 사전에 단어를 찍어가며 겨우 몇 마디 이어가는 정도. 그럼에도 그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런던에 머무르는 동안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면 내 방으로 놀러 오기도 하고, 공용 소파에서 간단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낮에는 늘 관광을 다녔기에 그다지 긴 시간 얘기를 나누진 못했고, 조식을 함께 먹자는 약속을 잡는다거나 그런 일도 없었다. 한국인은커녕 동양인조차 나뿐인 듯한 이런 곳에서 룸메이트 외에 개인적으로 말을 걸어주는 그가, 조금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내일이면 스코틀랜드로 여행 갈 거라는 나에게 그가 이런 제안을 해왔다.
"하루만 런던에 더 머물면서 나와 함께 관광을 다니지 않으련?"
그의 말에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여자 혼자 혈혈단신으로 이 먼 유럽땅까지 왔고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며 그다지 주눅 들어 다니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아무리 철이 없어도 배낭 속 짐과 함께 넣어 가지고 온 여행의 철칙이 있었다.
맞다. 이것은 지나친 친절로 느껴졌다. 나의 숙박은 오늘 밤까지였고, 날씨가 흐린 런던의 날이 아쉬워 이미 하루를 더 연장해서 머문 터였다. 벨기에 숙소에 제 날짜에 체크인하려면 스코틀랜드를 가고자 했던 계획에도 수정이 필요했다. 여행사에서 호스텔팩 상품으로 유럽여행을 온 터라, 각 나라에 머무르는 시간은 대충 정해져 있었고 일정을 변경하게 되면 일이 꽤 복잡해진다.
동양인 여자애 혼자 돌아다녀서 그런지 외국인들이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다정한 선의는 감사하다. 하지만 때때로 이것이 지나친 친절인가 아닌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거절해야 했다.
그는 프랑스인이라고 했던가, 사실 국적이 어디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나보다 제법 런던에 익숙해 보이는 그와 관광을 함께 다니면 런던의 새로운 면을 볼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고민하는 머릿속에 '웨용웨용'하고 빨간불이 요란하게 돌아갔다.
"NO. Thanks."
미안하지만 나는 내 계획대로 스코틀랜드를 가겠다.
스물셋의 여대생. 자신의 안전을 위해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고서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던 중에 문득문득 그가 생각났겠지. 그 감정은 여행의 감성까지 더해져 일기에 절절히 적혔을 거다. 하지만 내가 런던을 떠나기 전 그가 알려주었던 이메일은 없는 메일이었고, 그는 '지나친 친절을 베푼' 외국인이 맞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했던 고민이 무색하게 런던과 함께 떠오르던 그리움을 쓴 그의 얼굴은 거짓이었고 그렇게 일기는 찢겨 나갔다.
에든버러가 아니라 글래스고란 말이지. 버스에 더 타고 있었다면 에든버러에 도착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버스를 잘못 탄 걸까? 궁금증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글래스고로 왔으니 이곳을 관광하면 될 일이었다. 여행 책자를 촥 펼쳐 들었다. 다행히 글래스고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내가 내린 역 근처에 시청이 있었고 무료로 투어도 가능했다. 참여하기에 마침 시간도 딱 적당했다.
머무는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던 런던의 우중충한 날씨를 벗어나 맑은 하늘을 만난 것으로도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시청에 도착해 백발과 함께 멋지게 나이 드신 할아버지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I beg your pardon?"이라는 말을 외워두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할 일이 한두 번 이어야 말이지. 그런데 막상 런던에서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내게 "Sorry?" 또는 "pardon?"이라고 짧게 되물었다. 그걸 냉큼 배운 나는 시청에서 안내를 해 주시던 멋쟁이 신사분께 쏘리? 파든?을 몇 번쯤 했다. 그랬더니 노신사는 유쾌한 얼굴로
"Your English is very good."
라며 나를 놀렸다. 나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
설명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다정하게 관광객을 이끄시는 백발의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는 시간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주억이는 이들에 섞여 나는 천천히 눈으로, 코로, 피부로 이국적인 상황을 즐겼다. 안내해 주시는 몇 곳을 사진에 담고 글래스고를 뒤로하고 에든버러행 버스에 다시 몸을 실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예정된 일정은 오직 하루뿐. 오늘 밤에는 다시 야간 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돌아가 유로스타를 타고 벨기에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에든버러 성을 관광할 일정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의 머리칼을 가볍게 날리는 산뜻한 바람을 맞으며 에든버러 성에 올랐다. 성 안의 모습은 사진에 남았고, 그때의 생각은 기억 속에 남았다. 귀에 꼽힌 이어폰으로 흐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광고 음악'에 신이 났고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성과 파란 하늘 그리고 흰 구름은 나를 동화 속 공주님으로 만들어주었다. 세월을 간직한 돌길을 걸으며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흥얼거리고 표정 짓고 허우적대며 걷는 걸음마다 만족감이 차 올랐다.
2002. 10.14. 월
여기는 지금 식당 안.
밀린 일기를 마저 쓰고 있다. 여기 프랑스인이 제법 많다. 어제 첫날에 얘기했던 그 남정네랑 만나서 또 얘기했다. 그런데 언어가... 그는 만화를 그려가며 공감대를 찾으려 노력하는 듯했다. 노력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조금 민망했다. 내가 영어를 조금 더 잘했다면 좋았을 걸. 원래 그런 성격인지는 몰라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말을 걸어주는 그가 고마워서 한국에서 가져온 엽서를 한 개 써서 줬다. 다음에는 사진 찍자 그래야지!
주변에서 들리는 말이 온통 불어다. 어제 하룻밤 더 묵겠다고 계산하는데 호스텔카드 제시를 안 해서 6000원 덤터기 썼다. 윽!
오늘은 옥스퍼드 갔다가 맘마미아 봐야지. 어깨가 너무 아파서 가방도 하나 사야겠다.
아침에는 이래저래 서둘러도 왜 이렇게 매번 늦는 건지. 런던에 벌써 사일째인데 길거리에서 허비한 시간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좀 계획성 있게 다닐걸 후회가 조금 되네. 그런것마저도 내가 즐기기는 했지만 말이야.
무엇 무엇 유명한 것을 보고 있는 것보다 내가 이곳 사람들에게 친절을 받고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해내고 보고자 하는 것을 찾고. 이런 것들이 내겐 더 소중하고 재미있다.
오늘은 피카딜리 서커스, 레스터 스퀘어 등에서 쇼핑 좀 하고, 대영 박물관 갔다가 맘마미아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