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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외국인이 키스해도 되냐고 묻는다면?

by 병 밖을 나온 루기
2002.10.17. 목
역시나 많이 피곤했던가보다. 일기도 공부도 제쳐두고 잠만 꼬박 두 시간을 잤다. 마지막 영국의 경치도 채 못 보고 말이다. 아, 얼른 씻고 싶다. 복대도 은근히 숨 막히고 답답하다. 빨래도 꼭 해야 한다.

유로스타에서 내리니 내 시계는 5시 10분인데 역에 붙은 시계는 6시 10분. 한 시간을 훌쩍 잡아먹었네.(서머타임)

지하철을 타면서 경치도 보고, 런던을 떠올리며 비교를 하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벌써부터 런던이 그립다. 그래도 영국에서보다 한결 익숙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불친절한 직원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왔다. 시설은 런던 숙소보다 훨씬 좋다. 그래서 내일의 아침식사도 기대된다.

이곳은 영국보다 훨씬 따뜻하다. 아니, 그런데 저거 키 크다고 거울을 저래 높게 달아놔 가지고 얼굴도 안 보이니. 화장실에 달린 거울을 보자면 전부 발끝을 들어야 내 얼굴이 보인다.

2002.10.18. 금
일찍 일어나야지 하고 다짐을 하고 잤던 나는 7시쯤 눈을 번쩍 떠서 샤워하고 밥 먹으러!
식당을 찾아 얼쩡거리는데 breakfast? 하며 누가 알려줘서 무사히 식당에 갔다. 와우! 런던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고 귀엽게 생긴 소녀가 일본말로 내게 말을 걸었다. "I'm Korean."이라 말하고 서로 민망하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돌아간 방에서 삼성 드라마폰을 발견한 거다. 오호, 이 사람 한국인이군. 그런데 아는 척을 안 하고 있었단 말이지. 나는 냉큼 "저기요?" 하고 말을 걸었는데 대답이 없다. "Are you Korean?"이라고 물었는데 "No. your country."라고. 삼성폰은 이곳에서 샀다고 했다. 외국인도 삼성을 쓰는구나!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벨기에로 넘어왔다. 숙소를 이동할 때마다 10kg 배낭을 어깨에 메고 다니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까지는 한국에서 미리 예약해 둔 숙소가 있어, 방을 찾아서 헤매지 않아도 되었다. 벨기에에 머무는 기간은 그다지 길게 잡지 않아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관광하기로 했다.


작은 가방에 물, 수첩, 펜, 카드, 약간의 돈을 챙겨 중앙역으로 길을 나섰다. 길을 찾기 위해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를 골라 길을 물었다. 나는 영어로 묻고 그는 불어로 대답했다. 통하지 않는 언어 덕에 그는 직접 갈림길까지 나와 동행해주었다.


브뤼셀에 왔으니 그래도 오줌싸개 소년 동상은 봐야지. 지도를 보며 동상을 찾아 골목으로 향했다. 동상이 있는 곳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작은 소년을 보려고 모인 관광객들이 바글거렸다. 동상과 나를 한 컷의 사진에 담으려면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한다. 나는 카메라를 집어 들고 동상부터 찍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포즈를 잡고 있거나 또는 카메라를 들고 있고,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상을 카메라에 담고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각자 다른 나라에서 왔더라도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 대화하게 된다. 영어가 서툴더라도 서로의 모국어는 영어보다도 더 모르기 마련이고, 영어가 만국 공용어니까 - 한국어가 세계공용어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은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짧게라도 말이다. 그러면 묘하게, 쓰는 영어가 다 다르다는 느낌을 받는다. 각자 모국어의 억양이나 표현을 얹어서 영어를 쓰니, 안 그래도 힘든 영어 듣기의 난이도가 더 높아지곤 했다.


"What?"이라고 되묻는 내게 "사진 찍어줄까?"라고 말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는 외국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혼자 왔는지 등의 짧은 대화를 나누며 그랑폴리스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그는 모로코에서 왔다고 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어우 외국인들은 칭찬도 잘해- 고맙다는 인사로 답하고서 난 이제 그만 브뤼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낯선 길 한복판에서 받은 호의에 묘하게 마음이 따스해진 내게, 그가 말했다.


“Can I kiss you?”

'야는 또 갑자기 뭐라하노.' 이 질문에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NO!"라고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자, 여기서 혼자 여행하는 여대생이 배낭에 든 짐과 함께 넣어온 두 번째 철칙. 외국인의 지나친 친절을 거절할 때는 단호한 어조로 분명하게 말할 것.


''를 들은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Have a good trip."이라는 인사를 끝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말한 '키스'는 유럽식 뺨 인사였던 걸까, 아니면 정말 입맞춤을 의미했던 걸까? 처음 본 내게 그런 말을 했다면 무례한 것이고 뺨 인사의 동의를 구한 건데 내가 단호히 거절한 거라면 좀 미안해질 일이다. 이상한 외국인이라고 여기고 잘 거절한 나를 칭찬하며 여행하던 중에, '혹시 그의 말은 인사의 키스를 의미했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브뤼셀 숙소는 3인실이었고 룸메이트 중에 나처럼 배낭여행 중인 마리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대생이 있었다. 그녀를 브뤼셀 옆 소도시 브뤼헤에서 다시 마주친 거다.


혼자 길을 걷다 우연히 아는 얼굴을 발견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반가움의 비명을 지르며 다가갔다. 내게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내가 인지할 틈도 없이 나의 오른쪽 볼 그리고 왼쪽에, 차가운 그녀의 볼이 비볐다. 책에서만 봤지 처음 받아보는 그 뺨인사는 환영받는다는 감각과 그녀의 반가움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었다. 서로의 여행을 격려하며 저녁에 호스텔에서 다시 보자는 인사로 헤어진 뒤에도, 나의 뺨에는 그녀의 보드라운 볼의 촉감이 잔잔하게 남아있었다.

나처럼 배낭여행 중이었던 룸메이트 마리나

혹시, 그 낯선 이가 말한 키스도 이거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로코의 문화는 내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지금처럼 검색해 볼 스마트 폰도 없었기에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혼자 여행하니까 진짜 별 일이 다 있더라니까."라는 여행담의 소재중 하나로 남겨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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