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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짠 단짠한 암스테르담의 하루

by 병 밖을 나온 루기
오늘도 날씨가 좋네. 어제는 비오더만은. 대체 왜 이따구냐고. 난 오늘 떠나는데 말여. 비 와도 보슬보슬 와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지만 경치가 많이 죽는 것 같다.

어제 쓰러져서 일찍 잤지만 오늘 눈뜨니 8시. 그간 피곤했던가보다. 일어나기 싫은데 억지로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브뤼헤에서도 만난 마리나랑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짐도 싸고. 마리나 카메라에 내 모습 남기고 내 카메라에도 마리나를 남겼다. 한국에서 가져온 엽서도 한 개 건넸다. 마리나도 영어권 나라 출신이 아니라서 쉬운 영어만 쓰니깐 대화하기가 편했다.

미디역에서 암스테르담행 기차표를 샀다. 야채를 먹고 싶어서 샐러드를 사서 기차 안에서 콜라와 함께 냠 맛있게 먹었다.

이제부터는 할 게 많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는 소매치기도 많다 하고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숙소도 없다. 독일 뮌헨행 기차도 끊어야 되고. 유렐패스도 개시해야 한다. 내가 암스테르담으로 간다고 하니 마리나도 조심하라고 했다. 으~ 시간 있을 때 한국에 있는 친구들한테 보낼 써야겠다.


초보 여행자에게는, 이미 예약된 숙소를 찾아가는 일조차 그리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난관인 건 처음부터 숙소를 새로 구하는 것이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려 우선 인포메이션에 들러 지도를 구입하고 숙소 정보도 얻었다. 아무리 처음과 새로움의 연속인 여행이라지만, 현지에서 숙소 예약은 처음이라 또 긴장되었다.


기차역을 나와 처음 마주한 암스테르담은 예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넓은 길 한가운데 트램이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 모습이 퍽 이국적이었다.

휴대폰은 없었고, 나라가 바뀔 때마다 공중전화 사용법이 달라지기에 전화 예약은 쉽지 않았다. 결국 나의 두 발로 가까운 곳부터 직접 찾아가 물어볼 수밖에. 걸음이 더해질수록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도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두 번째로 들른 유스호스텔에 다행히 방이 있었다. 사실 네덜란드에서는 한인 민박에 묵어보고 싶었지만 그런 정보가 암스테르담 인포메이션에 있을 리는 만무했다. 내가 가진 유일한 가이드 북, 론리플래닛 책자에도 없었다. 아마 버려진 이지유럽에 많이 있었을 거야.



따뜻한 햇살은 이곳의 첫인상까지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다. 10kg짜리 배낭을 내려놓아 한결 편안해진 몸으로 거리로 나섰다. 걷다 보니 생경한 모습의 구조물 하나가 눈의 띄었다. 사람 키를 조금 넘는 높이의 그것은, 도로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남자 소변기 여러 개를 붙여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남자라지만 이렇게 대로변에서 볼일을 보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다.


머리 위로 물음표를 잔뜩 띄운 채 한참을 쳐다보고 있을 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30대쯤 되어 보이는 그는 자신을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현지인이라는 말에 나는 냉큼 이것이 진짜 남자용 공용변기가 맞는지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했다. 또또또 문화충격.

사람 키만한 흰 색 구조물이 길에 설치된 남성용 공용 소변기였다.

암스테르담이 꽤 위험하다고 들어 걱정이 된다는 나의 말에 그는 위험하지 않다고 말해주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그 말을 믿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는 여느 친절한 외국인들처럼, 혼자 다니는 나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밥 같이 먹으러 갈래.", "내일 같이 관광 다니자."같은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중앙역 근처에 성 박물관이 있었기에 그곳부터 들르기로 했다.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한 사진, 그림, 마네킹들이 가득해 다 둘러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제법 넓기도 했다. 한국인 민박에 묵게 되면 꼭 한국인과 같이 관광 다니겠다고 생각했었다. 별생각 없이 이곳을 남자와 함께 왔더라며 어땠을지 아찔해진다. 그래도 연인끼리 와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얘기 나누는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니 역시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바리 아저씨. 모두 저 아저씨가 웃옷을 활짝 펼쳤을 때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꼭 옷을 여미었을 때 찍어 달라고 당부했다.

네덜란드는 매춘도 대마초도 합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매춘거리인 홍등가는 관광지가 되었고, 이런 박물관도 제법 유명한 곳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해가 지고 난 골목은 대마초에 취한 사람들이 있어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홍등가만큼은 숙소에서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 함께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을 유럽의 해는 길지 않았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숙소를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때 한 외국인 남자가 말을 걸며 나를 따라왔다.

"유람선은 타 봤어? 내가 구경시켜 줄게. 홍등가도 같이 구경 가자."

그는 이런 말들을 쏟아냈다. 그가 풍기는 기운은 여태껏 만나왔던 친절한 외국인과는 달랐다. 무서웠고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일행이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둘러대며 거절했다. 따라오는 그를 겨우 떼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어느새, 나는 길을 잃은 것이다. 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오늘은 암스테르담의 첫날이었다.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 도시는 밤이 되자 더 낯선 곳이 되었다. 지도를 더듬으며 길을 걷던 중 눈앞에 벌건 불빛이 번져 보였다.


홍등가다.

암스테르담의 관광지로 가볍게 지나치며 구경하는 곳. 하지만 여행안내 책자에는 ‘여자 혼자 가지 말라’는 경고가 분명히 적혀 있었다. 정말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고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아 보았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한국인이었다. 양복 차림에 네 명쯤 되는 중년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아, 살았다!'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냉큼 다가갔다. 지도를 펼쳐 보이며, 숙소 위치를 가리키고는

"여기 어떻게 가는지 혹시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조금 황당했다.

"여기 안 좋은 데야. 어린애가 왜 이런 데를 돌아다니고 있어? 큰길로 가."

그는 차가운 말투로 말하고, 파리라도 쫓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길을 잃었냐’고 물으며, 지도를 함께 보거나 숙소까지 함께 가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들로부터 그런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마치 어린 학생을 대하는 듯한 반말에 차가움까지 더해진 대답을 들으며, 밤의 어둠이 더 어둡게 느껴졌다. 이럴 때면 여행 중 만나는 한국인이 현지의 외국인들보다 오히려 더 낯선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다시 큰길로 나와 지도를 확인하며, 처음부터 다시 길을 더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겨우 숙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구한 숙소는 바로 홍등가 근처였다. 체크인할 때는 대낮이라 분위기가 많이 달랐기에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이었다.

길을 잃은 나를 꾸짖던 그 아저씨들을 다시 찾아가 한마디 하고 싶었다.

"제 암스테르담 숙소가 이 근처거든요! 길 묻는 여자애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치시는 아저씨는 대체 이런 곳에서 뭐 하고 계셨던 건데요?"

나쁜 짓을 할 때 가장 무서운 건,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는 자국민이겠지. 쯧.


며칠간 나의 집이 되어 줄 유스호스텔로 돌아와 문을 열자, 마치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밝은 곳으로 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안은 따뜻했고, 밖의 홍등가와는 전혀 다른 젊은 활기가 넘쳤다. 16인의 도미토리 실이었던 방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한국인 자매를 만났다. 그들 역시 배낭여행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홍등가를 무사히 둘러보았다. 다음날에는 관광도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차갑게 기억될 뻔한 암스테르담의 첫날은 이렇게 따스하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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