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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던 시절의 밤기차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독일 뮌헨으로

by 병 밖을 나온 루기

은근히 피곤이 쌓였나 보다. 긴장이 풀린 탓일지도. 늦잠을 잤다. 그래도 어제 만난 기분 좋은 자매 중 언니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리셉션에 있는 총각이 잘 생겼다는 얘기로 깔깔 웃으며 하루를 함께 시작했다.


풍차의 도시, 잔세스칸스를 함께 구경하기로 했다. 내가 기대했던 네덜란드의 풍경을 드디어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초록의 풀들과 잔잔히 흐르는 물, 그 위를 떠다니는 오리들까지 고즈넉한 풍경에 저절로 마음이 평온해졌다. 내내 혼자 다니던 여행길에 첫 여행 메이트가 되어준 자매는 쾌활하고 다정했다. 우리는 깔깔 웃으며 마치 세 자매처럼 죽이 척척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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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마을에서 맡은 고소한 치즈 냄새가 좋았다. 하이네켄 공장에서 건네는 술 한잔에 내 볼은 발그레 달아 올라 못난이가 되었지만 그것도 좋았다. 그렇게 네덜란드는 사람과 함께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자매들과 남은 일정을 맞추어보니, 대충 체코쯤에서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우리는 전화기가 없으니 약속을 정해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행의 우연에 맡겨보기로 하며, 각자의 일정을 향해 다시 짐을 꾸렸다.

치즈마을, 하이네켄 맥주 공장



첫 야간열차를 타는 날이다. 짧지만 강렬했던 네덜란드에서의 1박 2일을 마무리하고 독일의 뮌헨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침대칸을 타고 가면 훨씬 안락하게 밤을 보낼 수 있겠지만 여행 경비를 생각해 일반칸을 타기로 했다. 거기다 아직 여행 초중반이 아닌가! 체력이 있을 때 돈을 아껴야 했다.

짐이 점점 늘어난다

의자는 한 공간에 3개씩 마주 보며 총 6개씩 있었다. 문이 있었지만 그 문은 잠금잠치가 없었다. 지정석이 아니었기에 어디든 빈자리에 앉으면 되었다. 10월 중순이 지난가을은 유럽의 비수기였기에 나는 손쉽게 빈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 두고 첫 야간기차 좌석을 사진에 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졸음이 몰려왔다. 배낭을 선반 위에 올려두고 자전거 자물쇠로 걸어두었다. 돈이나 여권 같은 주요 물품은 내 옷 속에 숨겨진 복대에 들어 있었다. 카메라와 소량의 돈, 카드 등은 작은 가방에 넣어 메고서 잠을 청했다. 유럽 배낭여행의 주요 이동수단이란 나의 두 다리였기에 밤이면 항상 피곤이 몰려왔다.


방에 불을 끄고 문을 꼭 닫고서 의자 팔걸이를 올리고 누웠다.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원래는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편이지만, 간혹 사람들이 문을 열어보는 소리에 정신만 미세하게 깨었다 다시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시쯤이었을까? 눈이 떠졌다. 어둠속에서 의자에 모로 그대로 누운 채로 바라본 반대쪽 좌석에는 키가 제법 큰 흑인 남자 한 명이 누워있었다. 꿈이라고 생각했을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였을까?


'어... 흑인 남자네.'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지만 금방 다시 잠들었다. 아침즈음 눈을 떴을 때 그는 없었고, 앞 좌석은 비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메고 잠들었던 작은 가방의 지퍼가 열려 있었다. 나를 깨운 여자분은 작은 가방을 툭툭 치며 관리를 잘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했다. 누군가가 내 가방 속 물건을 훔치려 했고, 때마침 내가 자던 칸으로 들어온 그 사람이 그걸 목격한 듯했다. 가방 안을 확인했지만 없어진 게 하나도 없었다. 돈도, 카메라도 유레일패스도 그대로 있었다.


"아 뭐야 아무것도 안 없어졌네. 뭐 내 물건은 마음에 안 들었나 본데?"

라는 허세가 잔뜩 발린 혼잣말을 하며 다시 가방의 지퍼를 꼭 닫았다.


2002년의 유럽은 이토록 안전했던 것일까? 다행히 나는 여행 내내 단 한 번의 소매치기도 당하지 않았고 잃어버린 물건 또한 없었다.


숙소를 잘못 구한 탓에 무서워서 도망 나온 상황, 분수 앞에 혼자 있는 내게 다가와 장미꽃을 강매하려던 사람, 팔에 줄을 엮어 돈을 달라고 하는 사람 등 지나고 나면 위험했던 순간들이 제법 있었다. 여행 내내 마치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참으로 겁 없던 시절이었기에 행운이 따른 겁 없는 추억들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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