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1. 빨간 맛 - 세 번째 이야기 "번 아웃"

by 낭만부인

Chapter 1. 빨간 맛 (본능적인 나)


3. 번 아웃_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나는 꽤나 부지런한 사람이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늘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고 계획대로 실천하려 노력하고, 그 끝에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게 아등바등 무언가를 해내면서 살아가는 편이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부지런히 운동도 해보고, 부지런히 책도 읽어보고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조금은 피곤한 인간이기도 하다. 이런 나에게도 한 번씩 찾아오는 온몸과 마음의 무기력함, 바로 번 아웃.

이 단어를 알기 전까지는 그냥 또 ‘슬럼프가 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슬럼프는 시간이 남아도는 한가한 사람들에게 오는 것이야.’라며 더욱 바쁘게 살아보려고 의미 없는 일정들 속으로 나를 밀어 넣곤 했다. 그러다가 너무나 극심한 무기력이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나 자신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부지런히 열심히 살아오던 나인데 어쩜 이렇게 극도의 무기력함에 빠질 수 있는 건지 이것 또한 심각한 마음의 병은 아닌 건지 인터넷 사이트에 부지런히 검색해 보았다. ‘번 아웃 증후군’이란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포부 수준이 지나치게 높고 전력을 다하는 성격의 사람에게서 주로 나타난다는 이 현상의 증상들을 읽고 있자니 하나하나 다 내 이야기 같았다.

생각해 보면 어릴 적부터 끊임없는 경쟁에 길들여져 왔던 것 같다. 어딜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마냥 매 순간을 남들보다 더 나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것 같다. 이제는 목표 없이 열심히 만은 살지 않겠다며 숨 고르기를 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선택해서 그 길을 천천히 가보자고 해도 온몸에 남아 있는 ‘성실 세포’가 나를 매순간 재촉한다. 넌 너무 게으르다고 조금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지금의 네 모습에 만족하지 말라고 내 안의 시끄러운 잔소리가 나를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내가 가진 에너지를 차츰차츰 소진시키는 듯하다. 어쩌면 남들이 나에게 바라는 기대치보다 내가 나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너무 높아 스스로의 삶에 만족감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 견뎌내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버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의 상태에 놓여버리는 것 같다.

처음 만나게 된 번 아웃은 나에게 걱정만을 안겨주었지만, 이런 번 아웃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이제는 편안하게 맞이하게 되었다. 아, 또 한 번 쉬어줘야 되는 시간이구나.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 기특한 내가 나도 모르게 다 써버린 에너지를 다시 한번 충전하고 가야 할 때이구나라고 생각한다. 번 아웃이 올 때면 타인의 말이나 응원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설픈 타인의 응원들 보다 잠시나마 수많은 해야 할 일들을 다 내려놓고, 마음껏 쉬었을 때만 다시 한번 충전되어 일어설 힘이 생긴다. 아무런 힘도 나질 않는데 일부러 힘을 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체놀이 하루 거하게 해주는 편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휴식이 되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온몸에 퍼져가는 행복감. 이런 꿀 같은 휴식이 다시 한번 나를 달려가게 만들 수 있는 꼭 필요했던 재충전의 시간인 것이다.

하루의 온전한 휴식마저도 사치가 되어버린 전쟁터 같은 숨 가쁜 세상이지만, 잘 쉬어주는 것 또한 내 삶의 중요한 시간이기에 오늘도 찾아온 번 아웃을 가볍게 웃으며 즐겨 보려 한다. 나무늘보처럼 온몸에 힘을 빼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히 아무것도 안 하는 오늘을 만끽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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