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1. 빨간 맛 - 두 번째 이야기 " 야식 "
Chapter 1. 빨간 맛 (본능적인 나)
2. 야식_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해가 저물고 분주했던 하루가 끝나면 소파에 기대어 의식 없이 티브이 채널을 돌려댄다. 하루 중 가장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는 시간, 바로 밤 10시이다. 전쟁 같았던 하루를 돌이켜보며 다음날의 전쟁을 위해 또 한 번 충전하는 시간.
알람 소리에 허겁지겁 눈 뜨자마자 출근한 회사에서 빈속에 삼켰던 쓰디쓴 아메리카노, 직장 동료들과 생존을 위해 한 술 떠밀어 넣은 점심 식사, 그리고 가족들과 혹은 혼자 집에 있는 반찬들로 대충 차려먹은 저녁식사. 하루를 영혼 없는 식사들로 배를 채우고 나면 잠들기 전 어김없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야식의 유혹. 내일이면 또 1kg 불어있을 몸무게를 생각하자면 우유 한 잔 데워먹고 잠을 청해야 할 터인데, 내 손은 이미 분주하게 배달 앱을 켜서 검색하고 있다. 하루 종일 대충 먹은 날 위해 조금 더 기름지고, 조금 더 매운맛을 찾고 또 찾아본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치킨은 살 안 찌고, 나만 살찐다는 바로 야식의 왕, 치킨!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매일 먹으면 입에 물릴 텐데, 치킨은 참으로 훌륭한 음식이다. 먹어도 먹어도 처음 베어 물 때 터져 나오는 감탄은 줄어들지 않으니 말이다. 겉은 바삭바삭한 것이 속은 부드러운 살들로 알차다. 요즘엔 간장도 부어 넣고, 마늘도 부어 넣고, 심지어 짜장도 부어 넣으면서 치킨은 각양각색의 메뉴로 변신하는 변신의 귀재가 되었다. 브랜드 별로 맛도 각기 달라 오늘은 숯불 향 나는 치킨으로, 내일은 튀김옷 잔뜩 입은 치킨으로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치킨을 선호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가울 정도로 치킨의 취향도 꽤나 중요해졌다.
유난히 힘들게 하는 일들이 연속으로 있었던 날이면 매콤한 야식들이 날 먹고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라고 손짓한다. 눈물 나게 매운맛을 보여 주겠다며 고추장을 만난 닭발과 족발 그리고 떡볶이가 새빨간 캡사이신을 온몸에 두르고는 침샘 폭발시키는 자태를 뽐낸다. 한입만 먹어도 ‘스읍, 스읍.’ 연발하게 만드는 매콤한 야식들의 얼얼함에 하루의 스트레스가 한방에 날아가는 것 같다. 화끈하게 매운맛에 머리가 띵하지만 계속해서 손이 가는 중독의 빨간 맛. 말초 신경에 켜켜이 쌓여있던 하루치의 짜증과 분노를 깨끗이 씻어 내주는 마법의 맛이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편안하게 음미하는 야식의 묘미란 세상 그 어떤 즐거움보다 크다. 점점 배도 차오르고, 하루에 대한 피로도 녹아내리는 듯하다. ‘살기 위해 먹는다.’와 ‘먹기 위해 산다.’는 파가 나뉠 정도로 삶에서 먹는 행위가 주는 만족감은 어마어마한 것 같다. 몸매 관리의 이유로 야식을 먹으면 죄책감으로 이어졌던 패기 넘치던 20대 시절이 지나고, 후덕해진 몸으로 점차 바뀌어가고 있는 요즘, 먹는 행복이 주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일은 오늘 먹은 만큼 덜먹으면 되지.’ 또는 ‘더 움직이면 되겠지.’라고 마음의 합리화를 늘어놓고는 기름진 포만감을 안고 스르르 잠이 든다. 밤새도록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내 위장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입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되었다며 든든해진 배를 껴안고 내일을 위해 꿈나라로 떠난다.
이렇게 전투적으로 먹다가는 곧 몸무게의 앞자리 수가 바뀔 것 같아 몸도 마음도 무거운 요즘이다. 조금씩 야식을 먹는 횟수를 줄여볼 테지만, 그래도 야식이 선사하는 그 맛깔나는 행복은 앞으로도 계속 누릴 듯하다. 바람이 차다. 오늘은 허기진 몸과 마음을 채워줄 뜨끈한 마라탕 한 그릇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