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1. 빨간 맛 - 첫 번째 이야기 " 술 "
Chapter 1. 빨간 맛 (본능적인 나)
1. 술_술이 들어간다~쭉쭉쭉쭉!
술을 먹기 시작한 건 술집 통과가 허락된 갓 스무 살의 봄이었다. 입에 쓰기만 했던 술은 이십 대 중반이 넘어서자 주말마다 함께하는 유흥의 필수품이 되었고, 서른이 넘어서자 하루의 피로를 씻겨주는 보약 같은 친구가 되었다. 피곤해서 한 잔, 기분이 좋아서 한 잔, 울적해서 한 잔, 맛있는 안주가 있어서 한 잔... 술과 함께하는 날들이 늘어나면서 온몸에 알코올이 흐르는 것 같은 날들도 많아졌다. 술보다도 술자리를 더 좋아했던 젊은 날의 나는 어디 가고, 이제는 정말 술이 좋아 함께하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꺼내 마시는 날들이 늘어났다. 맛있는 음식에 어울리는 술을 세팅하고 한 잔 들이켜면 세상 하루의 피로가 다 씻겨나가고, 긴장되어 있던 오장육부가 풀리는 기분이다. 스스로 하루를 잘 견뎌냈음에 대견해하며, 오늘도 수고했다고 보상해 주는 시간. 바로 술잔을 드는 그 시간이다.
술이란 것이 다음날 더 큰 피로감과 속 쓰림을 선사하지만,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이내 그 고통을 다 잊고는 다시 꺼내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이다. 술이 온몸 구석구석 퍼질 때면 그동안 맨 정신으로 긴장하며 살아낸 시간들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들보다 해야 할 일들을 더 많이 해내며 살아가야 하는 하루하루가 웃음기 없는 긴장의 연속인지라, 술이 몸속에 따뜻하게 퍼질 때면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 나오고 힘주고 있었던 온몸도 부드럽게 내려앉는다. 여기저기 눈치만 보던 나의 눈도 풀려가고 바른말만 뱉어대던 나의 혀도 꼬여가고 쉴 새 없이 바쁘게 걷던 내 다리도 흐물흐물해진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남들만큼 또는 남들보다 더 잘 살아내기 위해서 붙잡고 있던 의식을 일부로라도 놓고 싶어 술을 들이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역할과 끝나지 않는 걱정과 불안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잠시 내려놓은 의식 덕에 취중진담이 흘러나오는 날들도 많다. 술의 힘을 빌려 말하기 힘든 진심들을 내뱉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 진심이 독이 될 때도 있고,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말이다. 조심성 많고 내성적인 성향이라 평소에는 내 의식이 붙잡고 있어 내뱉지 못했던 수많은 말들이 술의 기운을 타고 편안하게 흘러나온다. 그래서 누군가는 술이 삶의 윤활제라고도 한다. 긴장의 연속으로 뻑뻑하기만 했던 나와 내 삶을 부드럽게 만드는 역할을 해주니깐 말이다. 술이 있어 속상하고 힘겨운 날들도 한 잔의 술과 함께 털어 내고, 좀 더 쉽게 그날들을 견디고 잊을 수 있게 된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고민들이 많기에 그 시간들을 좀 더 부드럽게 넘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알게 된 낯선 사람들과도 조금 더 진실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다.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던 마음속 깊은 걱정과 아픔들을 꺼내어 서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아무 걱정 없이 살 것 같은 사람들도 저마다의 걱정과 아픔이 있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다 보면 훨씬 가까워져 있는 서로를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양만 다를 뿐 저마다의 걱정과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나면 훨씬 가벼워진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건강이 걱정이 되는 나이어서 부지런히 밀크씨슬도 챙겨 먹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독이 되는 시간보다 약이 되는 시간이 더 많았기에 앞으로도 나는 애주가의 길을 갈 것이다. 오늘도 수고 많았다. 술잔을 채우고 한잔하자! 눈부시게 멋질 그대의 날들을 위하여,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