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1. 빨간 맛 - 네 번째 이야기 "불장난"

by 낭만부인

Chapter 1. 빨간 맛 - 세 번째 이야기 " 번 아웃"

Chapter 1 빨간 맛 (본능적인 나)


4. 불장난_우리 엄만 매일 내게 말했어 언제나 남자 조심하라고


열 살의 소녀는 또래의 다른 남자친구들보다 의젓하고 다정했던 한 소년을 좋아하게 된다. 일 년 내내 같은 반이었지만, 수줍어 말 한번 못 건네어보고는 그 소년과 결국 열한 살이 되면서 다른 반이 되어 헤어지고 말았다. 열여섯의 여중딩이 된 그 소녀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만난 옆 학교 남학생에게 첫눈에 반하고, 사귀어 보자는 고백 대신 당시에 핫했던 드라마의 배경음악이 담긴 노래 테이프를 생일선물로 건넨다. 하지만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대학 입학이 목표가 아닌 취업을 준비시키는 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이라는 그 남학생의 선택으로 연애는 시작도 못해보고 아쉬운 이별을 한다.

연애는 대학 가서 하라던 엄마의 말씀을 꿀떡같이 듣고는 어영부영 짝사랑으로만 보낸 십 대 시절이 지나가고 맞이한 이십 대. 드디어 마음껏 합법(?)적으로 연애라는 것을 해봐도 되는 시기가 되었다. 미팅, 헌팅, 소개팅.. 팅이란 팅은 마음껏 해보고, 마음껏 썸도 타보고, 진한 연애도 시작해본다. 이제야 뭔가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떠들어대던 사랑이란 감정을 알아가고 배워가기 시작한다. 귓가에 종소리가 들린다는 첫 키스의 짜릿함도 느껴보고, 알콩달콩 연애편지도 써보고, 밤새도록 수화기를 붙들고 서로를 알아가고, 남들이 들으면 닭살 돋는 애칭들도 불러보고, 그동안 못해봤던 온갖 연애질을 해나간다.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외모로 가꾸고, 호감을 가질만한 말투와 표정, 제스처까지 온몸에 익히려고 갖은 애를 쓰면서 나의 불장난은 정점을 찍는다. 이제는 남자들의 속내를 다 알 것만 같은 연애고수가 된 듯한 기분이 들 때쯤, 길었던 진한 연애의 끝을 보게 되고, 남들이 한다던 이별 증후군을 하나씩 하나씩 모두 겪게 된다. 친구들을 모아놓고 술로 잊어보려 애쓰고, 아무리 잊어보려 해도 떠오르는 번호로 전화도 걸어보고, 방구석에 온몸을 엎드려 울기도 하고, 그렇게 화려했던 나의 봄날들을 서서히 지워내고, 또 지워낸다. 그때 한 걸음 뒤에서 나의 불장난을 지켜보고만 있던 엄마가 다가와 말한다. 남자 조심하라고.

세상에서 제일 본능적이고 재미있는 일이 연애가 아닐까 싶다. 예쁘게 꾸미고 나가 예쁜 행동과 말을 늘어놓고는 거기에 빠져드는 내 스타일의 이성의 눈을 쳐다보고,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일. 그것만큼 즐겁고 신나는 기분은 다른 어떤 일에서도 찾아보지 못할 것 같다. 낯선 이에게서 받는 관심 어린 눈빛과 서로의 공통점을 확인해보고 웃음이 넘치는 대화, 그리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매력적인 사람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일. 첫눈에 활활 타오르던 불장난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에게 온기로 남았다가 결국엔 잿더미를 남길지라도 처음의 그 타오름이 너무 강렬해 끊을 수 없는 장난질인 것 같다. 아픔으로 끝난 불장난이었어도 또다시 다른 사랑을 찾게 되는 걸 보면 말이다.

사랑도 연애도 이제 감정노동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낯선 이성에게 받는 호감 어린 눈빛은 언제 봐도 설레는 일인 것 같다. 상처가 생긴다면 아무는 일은 시간에게 맡길 일이다. 상처가 있다 해서 또 다른 사랑을 꿈꾸면 안 되는 법은 없으니깐 말이다.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사랑을 꿈꿀 수 있는 그 뜨거움이 그대를 새로 살게 할 원동력이 될 것이다. 뜨겁게 살다가 생긴 흉터는 잘못이 아니라 배움이고, 자랑이다. 오늘도 불장난을 꿈꾸며 빨간 립스틱에 높은 힐을 신고 문밖을 나서본다.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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