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님, 저 죄송한데... 김치 좀 더 주세요.” 남에게 싫은 소리도 못하고, 부탁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성격이라 식당에서 반찬을 더 달라고 말할 때에도 최대한 공손하게 부탁한다. 큰 맘먹고 부탁한 김치를 가지고 오신 식당 이모님은 탁자 위에 김치 그릇을 거의 내 던지듯 ‘탁’ 놓고 가신다. 그때부터 내 안의 위장 아래쯤에서 뜨거운 화의 불길이 올라온다. 김치 추가가 안 된다고 한 곳도 아니고, 내가 무례하게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뭐 때문에 그리 화가 나셨는지 그 불똥이 나한테로 튀었을 땐 당황스럽고 몹시 불쾌하다. 뉴스에서는 연일 ‘갑질 논란’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인데, 나 같은 사람에게는 반대로 ‘을질’이 불쾌할 때가 더 많다.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거나 내가 사 입으려 하는데 판매하는 사람이 오히려 짜증 섞인 말투로 대하거나 심지어 화를 내기도 하는 상황들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요즘에는 항상 말하기 전에 습관처럼 붙였던 ‘저, 죄송한데...’를 말하지 않기로 결심도 해본다. 무조건 친절하게 대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짜증과 화라는 감정 쓰레기를 남에게 전달하지 않는 선에서 예의를 갖추고 사람을 대해야 하지 않나 싶다.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무수히 썼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여러 번 거절당하고는 내 안은 화로 가득 차 있었다. 이력서의 빈칸들을 얼마나 더 화려하게 메워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동안 나는 뭘 하느라 이렇게도 많은 빈칸을 만들어 낸 건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물건을 팔 때는 따뜻해 보였지만 사람을 채용할 땐 차디차기만 한 회사들에게 그리고 더 열심히 살지 못한 나에게 화의 응어리가 쌓이고 쌓였다. 남들과 비교하면서 나의 한계에 부딪힐 때면,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나 못 견디게 힘든 날들도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열등감을 먹고 자란 화의 불씨가 타인에게 튀기도 한다. 괜히 가족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애꿎은 이불을 부둥켜안고 눈물 섞인 샤우팅을 하기도 한다.
화의 절정은 육아의 길을 걷게 되면서 맞이하게 된다. 욱하는 성격이 있다는 건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이 욱함을 그동안 끊임없는 정신 수양으로 많이 눌러가며 살아왔는데, 이 작은 생명체로 인해 나의 욱함은 봉인 해제를 맞이하고 괴물처럼 한 번씩 폭발을 일으킨다. 말 못 하고 몇 시간씩 울기만 하는 애를 부여잡고, 말은 하기 시작했지만 드러누워 떼쓰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글을 가르쳐보겠다고 앉혔지만 끊임없이 딴짓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육아를 하는 내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속에는 불길이 오르내린다. 욕이 섞인 소리를 한번 시원하게 내질러버리고 싶지만, 언어폭력도 폭력이라는 요즘 육아서의 말대로 아이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마음으로 나의 화는 매일매일 꾹꾹 저장되어 있다.
결국은 화라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어떤 상황의 결과가 나의 생각과 기대감에 어긋나 버리면 화가 샘솟는 것이다. 저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다르고, 똑같은 상황에서도 상황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보니 화가 나는 포인트들도 제각각일 수 있다. 화라는 감정을 안 좋은 감정만으로 여겨 참고 또 참았던 적도 있었다. 화를 쉽게 낸다는 것은 참을성이 없고, 성격이 나빠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제는 내 안의 화를 더 깊게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왜 내가 그 상황에서 그렇게도 화가 났을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 안의 상처와 마주할 때도 있고, 내 안의 욕심과 마주할 때도 있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만들어내는 화는 어쩌면 가장 나답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열정적인 나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어김없이 용 솟는 화를 한숨으로 내보내며, 목덜미 한번 주물러주고 가슴 한번 쓰다듬어 준다. 그 뜨거움이 좋은 에너지로 바뀔 수 있게. 쓰담쓰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