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2. 파란 맛 - 다섯 번째 이야기 "역할놀이"

by 낭만부인

Chapter 2 파란 맛(이성적인 나)


5. 역할놀이_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지금으로부터 36년 전 봄, 나는 세상에 태어났다. 한 집안에 딸로, 그리고 둘째로 말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먹고 자고 싸고를 충실히 해내며 건강한 어린이로 성장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약 16년간 학생이라는 신분을 부여받고 열심히 공부에 집중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엉덩이 힘을 키운다. 사람들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수많은 역할들이 주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한 집안의 딸로서, 둘째로서, 학생으로서 말이다. 이 역할들은 내가 원해서 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린 사회적 동물인지라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해가며 살아간다. 딸로서 부모님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고, 둘째로서 집안의 재롱둥이를 도맡아 하고, 학생으로서 책상 앞에서 수많은 문제집들을 풀어가며 말이다.

사회로 나와 처음 만난 직장에서는 그 직업의 역할이 또 주어진다. 내가 택한 첫 역할이지만 꿈꾸던 대로 재미있는 일들만 기다리고 있진 않다.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해야 할 일들이 쏟아지기도 하고, 그 역할을 지키기 위해 내가 이전에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내기도 한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밤마다 알람을 수십 개씩 맞추고 잠을 청하고, 아침마다 '지옥철'에 몸을 싣고, 상사의 기분에 장단 맞춰주고, 생전 처음 보는 고객에게 해맑은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기도 한다. 내가 택한 역할이지만, 이 역할이 버겁게 느껴지는 날엔 나도 한 가정에 사랑받는 둘째 딸이고, 맘 편히 몸 편히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해도 되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결혼을 하고 나면 자동으로 두 가지의 역할이 따라붙는다. 바로 '아내의 역할''며느리의 역할'이다. 그동안 여자와 남자, 개인 대 개인으로 교제를 해왔던 남녀는 남편과 아내라는 감투가 생기고, 그에 걸맞은 역할들을 해내야만 평온한 결혼생활이 가능해진다. 남편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물질적 정신적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하고, 아내는 '내조의 여왕'이 되어 알뜰살뜰 살림살이를 하고, 남편을 잘 보필해야 할 것 만 같은 '주변의 기대'들이 생겨난다. 더불어 일 년에 두 번의 명절과 네 번의 양가 부모님들의 생일잔치 그리고 각종 집안 행사들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시댁에 들어서면 평소에 무뚝뚝하고 애교 없는 나일지라도 솔 톤의 목소리로 이 얘기 저 얘기 끄집어내가며 싹싹함을 선보여야 하고, 요리에 꽝인 똥 손 일지라도 집에서 9첩 반상을 차려 남편에게 내줄 것 같은 솜씨를 부지런히 선보여야 한다. 온몸에 긴장한 채 내 '역할놀이'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면 내가 했던 말과 행동들을 복기하며 잘못한 건 없었는지 떠올리다 녹초가 되어 잠에 빠져든다.

세상에 그 수많은 역할들 중 가장 위대하고 힘든 것이 바로 '엄마의 역할'이지 싶다. 6년 전 시작된 나의 엄마 역할은 이제까지 해왔던 역할들을 '오징어 땅콩'으로 만들어버리고, 최강 힘든 '역할놀이'들을 선사했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였고,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게 하였고, 밥을 제때에 먹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내 온몸과 마음을 다해 정성껏 키우고 있었지만, 옆집 언니와 앞집 동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나는 하염없이 '불량엄마'로 전락하고 만다. 마음만은 별도 달도 따다 주고 싶은 엄마인데, 이제껏 홀몸으로 살아오던 라이프 스타일과 내가 가진 적당한 게으름이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한없이 부족한 엄마가 되어버린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면 내가 엄마가 될 자격이나 있는 건지, 왜 나만 이렇게나 힘든 건지 ‘이 역할놀이는 그만두고 싶다.’라는 생각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들곤 했다. 그래도 엄마라는 역할놀이 중 가장 행복한 건 내가 아무리 부족한 엄마일지라도, 엄마가 최고라고 여기는 '아이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렇게 모자라고 부족한 엄마인데도 찾아와준 아이에게 감사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이 역할놀이를 끝까지 잘 해내고 싶다.

아이들의 역할놀이를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면 정답도 없고, 승자도 패자도 없다. 그저 아이들은 서로 재밌는 대사와 행동을 주고받으며 웃으면서 놀이에 '몰입'할 뿐이다. 앞으로 나에게 어떤 역할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 주어지는 역할들을 힘들겠지만 즐겁게 그리고 재밌게 해내고 싶다. 수많은 역할들에 치이기도 하고 역할들끼리 부딪혀 혼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왕에 주어진 역할들을 놀이하듯이 많이 웃으며 잘 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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