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2. 파란 맛 - 네 번째 이야기 "결혼"

by 낭만부인

Chapter 2 파란 맛(이성적인 나)

4. 결혼_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옛날 옛적 어느 나라에 한 어여쁜 아가씨가 살았답니다. 그 아가씨는 우연히 파티장에 갔다가 그 나라 왕자님과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에 빠져 힘든 역경을 뚫고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어린 시절 읽었던 공주 시리즈 동화책 속 공주님들은 어쩜 그리도 마음씨도 예쁘고, 얼굴도 예쁜지 만났다 하면 사랑에 빠져드는 왕자님과 신분의 격차도 경제적 격차도 넘어서고 결혼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어린 나에게 결혼이란 종종 무섭게 싸워대지만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엄마, 아빠의 현실적인 모습과 책이나 드라마 속 아름다운 커플들의 가슴 설레는 해피엔딩이 뒤섞여진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백마 탄 왕자님이 기다리고 있고, 결혼과 동시에 그동안의 힘든 세상사가 끝이 나고, 행복한 꽃길만 걸을 수 있는 그런 삶이 시작될 것이라는 환상이 숨겨져 있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노력해서 예뻐지면 그런 백마 탄, 아니 벤츠 탄 왕자님이 날 만나러 와줄 것이라고 다 큰 아가씨가 되어서도 마음 한켠에 자그마한 환상을 지니고 살았다.

나도 한때는 공주님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로 결혼 전 3년의 연애 기간이었다. 스물다섯 가장 핫한 청춘기에 한 살 많은 그를 만나 우린 뜨겁게 연애했고,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되어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챙겨가며,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일상을 함께했다. 그는 세상 그 누구보다 나를 우선시했고, 내가 세상의 전부인 양 나를 아끼고 위해주었다. 그 따뜻한 눈빛과 말투와 행동은 나를 충분히 공주님처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비록 벤츠 탄 왕자님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함께 살다 보면 벤츠보다 더 값진 것도 가져다줄 것만 같은 든든한 나무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뜨거운 여름날, 3년간의 열애를 마치고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현실적인 문제들이 불쑥불쑥 우리의 사랑에 장애물로 등장한다. 집 준비부터 살림장만, 그리고 예식장비나 예물, 신혼여행비 같은 사소한 것까지 돈과 관련된 수많은 여정들이 서로를 갉아먹고 지치게 만든다. 물론 서로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었고 의견이 잘 맞았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모든 준비과정이 싸울거리 투성이가 된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는 아침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시월드' 나는 이 사람이 좋아서 이 사람 한 사람을 택했을 뿐인데, 그의 뒤에는 그를 키워주신 감사하지만, 그와 너무 다른 시부모님이 계시고, 그 집에 들어설 때면 우리 집 분위기와 너무 다른 낯선 가족들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들이 밉고 싫은 게 아니라, 그저 불편할 뿐이다. 내가 언제 그렇게 불편하게 대했냐고 어른들께서는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불편한 마음은 누군가가 불편함을 줘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내가 잘하고 싶고, 예쁨 받고 싶은 마음에 노력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서로 다른 생각들과 상처 되는 말과 행동들이 켜켜이 쌓여 나에게는 벅차고 불편한 관계로 남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그렇게 서로의 집에도 맞춰가며 살아가다 보면 소중한 '보물'이 하나 생긴다. 바로 '아이'이다. 아이가 생기면서 서로에 대한 에너지는 오로지 아이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히 여자와 남자의 관계보다는 엄마와 아빠의 관계가 더 진해져 서서히 '애정의 부부'에서 '우정의 부부'로 변해간다. 처음 맞이하는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잘 해내고 싶어 온몸과 마음을 아이에게 바치고 나면, 서로를 챙길 여유는 고갈되어 버린다. 서로에게 애정표현은 사치가 되어버리고, 예쁘게 보이고 멋지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저 지하창고에 고이 넣어둔 채 각자 맡은 바 의무를 다해가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시들어버린 내 마음의 꽃을 보고는 시무룩해져, 야근에 쩔어 잠든 그의 돌아 누운 등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우리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결혼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고,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버린 요즘이라지만, 철없던 젊은 시절에 아름다운 상상만으로 내린 선택이라, 결혼생활이 주는 수많은 역할과 무거운 책임감들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다. 어쩌면 본능에 따라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겠다고 했다면 하지 않았을 결혼이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것이 맞는 길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의 짐이 덜어지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느냐는 미혼인 친구들의 질문을 들으면 어떤 답을 해줘야 할지 고민한 적도 많았다. 결혼은 했지만 ‘비혼 주의자’라고 우스갯소리로 답변을 하고 나면 씁쓸한 마음이 밀려오곤 했다. 모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존재하는 법이고, 혼자를 택한 '자유로움'이 있다면 둘을 택한 '아름다운 구속'이 있을 것이다. '해피엔딩'이 아닌 '인생종합선물세트'같은 결혼의 길을 택한 나로서는, 앞으로 아내로 사는 시간과 엄마로 사는 시간과 나로 사는 시간의 균형을 맞춰가며 내가 한 선택을 즐기면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택한 고단하고도 무거운 이 길이 힘들지만은 않은 아름다운 여정이 될 수 있게. ‘행복하게 살았답니다.’가 아닌 ‘행복하게 살아냈답니다.’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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