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2. 파란 맛 - 여섯 번째 이야기 "가면"

by 낭만부인

Chapter 2 파란 맛(이성적인 나)


6. 가면_멀티 페르소나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를 감고 양치와 세수를 하고 단정한 옷을 골라 입고 직장으로 출근하면서 지난밤, 퇴근하고 밤새도록 품속에 넣어두었던 ‘가면’을 다시 꺼내 쓴다. 첫 번째 나의 가면은 ‘프로페셔널 가면’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에서 전문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사람들과 소통도 잘 하며 일을 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게 만드는 가면이다. “이 대리, 이거 오늘까지 가능하지?” “넵! 가능합니다.” 사소한 실수도 허락되지 않고,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상사에게는 충성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만능 액션 가면’이다. 이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은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평생을 이 직장에 뼈 묻을 사람처럼 열정을 다하는 사람처럼 살아간다.

퇴근시간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능 액션 가면’을 벗고 새로운 가면을 꺼내 쓴다. 바로 가족용 ‘나 조금 피곤하지만, 씩씩해요 가면’이다. 오늘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족들이 알지 못하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오늘 하루도 밥벌이 잘하고 왔다는 보람찬 표정을 선보이는 가면이다. “밥은 먹었니?” “네, 당연하죠. 시간이 몇 시인데.” 이 가면은 적당히 밥은 먹었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정도의 안부를 말할 뿐, 오늘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일을 했는지 어떤 기쁨과 힘듦이 있었는지는 적당히 숨길 줄 아는 가면이다. 마음속 얘기를 꺼내봤자 가족들에게 걱정만 안겨줄 것 같아 적당히 내 마음과는 조금 겉도는 이야기들로 하루를 마감한다.

샤워를 하고 편안히 침대 위에 누워 휴대폰을 꺼내어 SNS를 켜고 오늘 하루 중 가장 행복했던 찰나를 찍은 사진을 업로드하며 나는 새로운 가면을 또 꺼내 쓴다. 바로 ‘나 이만큼 잘 살고 있어요 가면’이다. 오늘 하루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어도, 점심시간에 잠깐 한입 베어 문 마카롱이 기똥차게 맛있었다면 그 순간을 사진에 담아내고 여유 있는 시간에 감성 넘치는 피드와 함께 업로드를 하며 ‘그래, 오늘도 괜찮은 하루였어.’라고 착각에 빠져본다. 그렇게 한참을 나의 계정에서 ‘추억팔이’를 하고 있자면 ‘사진 속의 나는 이렇게도 행복해 보이는데, 지금 난 왜 이리 마음이 힘들지?’하는 자기성찰의 시간과 마주하기도 한다. 무의식적으로 둘러보기를 하다가 연예인만큼 예쁘고 돈 많아 보이는 ‘인플루언서’ 언니들의 피드를 하나하나 읽다가 어느새 나 자신을 열등감 구덩이로 밀어 넣기도 하는 ‘기분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가면’이기도 하다.

주말이 되면 가끔 친구를 만나 주 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이야기 나누며 풀기도 한다. 아홉 살 때 만나 27년째 우정을 이어가고 있는 절친을 만날 때면 ‘나 사실은 말이야 가면’을 꺼내 쓴다. 다른 가면들이 두껍고 무거웠다면, 이 가면만큼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가면’이다. “와~사장이 그때 말이야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어머, 미쳤다 진짜.” 직장에서 있었던 힘든 일이라든지, “엄마 역할 못 해먹겠다 진짜.” “나도, 그래도 너는 잘하고 있으면서 뭘.” 집에서도 꺼내지 못할 말들을 꺼내어 놓는다. 이 친구를 만나면 다시 아홉 살 순수했던 그때로 돌아가, 내 마음속에 꾹꾹 눌러놓았던 말들을 모두 꺼내어 보고, 서로서로 힘들었던 마음을 나누고 공감해 주고 위로한다. 비로소 나를 감춰야만 했던 가면들을 잠시나마 조금 벗고, 숨통을 틔우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이렇게 온전히 가면을 벗고 서로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한 순간일 때도 많다.

페르소나(persona)라는 단어는 '가면'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로, 심리학적으로는 타인에게 파악되는 자아 또는 자아가 사회적 지위나 가치관에 의해 타인에게 투사된 성격을 의미한다고 한다. ‘멀티 페르소나’라는 말은 ‘다중적 자아’라는 뜻으로, 개인이 상황에 맞게 가면을 바꿔 쓰듯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여 ‘다양한 정체성을 표출하는 현대인’을 나타낸다.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하고, 자기가 가진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면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너무 두꺼운 가면들을 여러 개 바꿔 써야 하는 사람일수록 삶이 더욱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한 번씩은 모든 가면들을 내려놓고 내 민낯으로 편안하게 쉬어주는 시간들도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성적으로 만들어낸 여러 가면들을 잘 보관하면서도 한 번씩은 가면을 벗고 내 마음을 챙기는 시간도 가져보자. 또다시 마주할 다음의 연극에서 더 멋진 가면을 쓰고 더 멋진 연기를 해내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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