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라색 인간입니다

Chapter 3. 보라색 맛 - 세 번째 이야기 "여행"

by 낭만부인

Chapter 3 보라색 맛(본능과 이성사이)


3. 여행_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어릴 적 나에게 여행이란 아버지의 하계휴가에 맞춰 온 가족이 텐트 하나를 차에 싣고, 국내의 계곡들을 찾아가 1박이나 2박을 하고 돌아오는 것이 전부였다. 물놀이를 좋아했던 나는 계곡물에 들어갔다 하면 밥을 먹을 때 빼고는 하루 종일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안경 하나만 장착하면 자그마한 계곡 웅덩이는 오대양 못지않게 나에게 크나큰 놀 거리를 마련해 주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아침이면 온 가족이 들떠서 먹을 것도 넉넉히 챙겨 넣고, 옷가지와 장난감도 가방 가득 챙기면서 일상과 다른 풍경에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 달간 유럽 8개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건 대학생 때였다. 숙소만 예약해둔 채 온전히 직접 여행 노선을 짜고, 여행지를 공부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던 자유여행이었다. 여행지에 도착했을 때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온몸의 긴장을 늦출 순 없었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져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서 더 큰 세상에서 나도 덩달아 맘껏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Excuse me, can I take a picture with you?”를 물어가며 가능한 한 많은 현지인들과 사진을 찍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조심성 많고 내성적인 편이라 먼저 말을 거는 성격이 아닌데도 낯선 타국에서는 조금은 대담하게 살아 볼 수 있었다. 야간열차에서 만난 ‘프랑스 노부부’와 서로의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밤도 잊지 못한다. 열두 명 정도 되는 처음 보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호스텔 방바닥에 둘러앉아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로마의 밤’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가장 절실했던 것은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아이와 24시간 붙어서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가장 절실했던 시간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여행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고등학교 동창이 친구들 4명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제안했다. 남편과 남겨둘 아이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너무나 간절히 원하던 나만의 시간이었기에 떠나기로 하고, 전국 각지에 살고 있던 5명의 친구들은 제주도에서 만났다. 우린 다시 여고딩이 된 것 마냥 3박4일 동안 한순간도 빼먹지 않고 웃고 떠들었다. 여러 책임감들로 나를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잠시나마 벗고, 마음껏 먹고 마시고 웃었던 ‘제주도의 푸른 밤’을 아직도 지칠 때마다 꺼내어 회상하곤 한다.

여행을 떠나려면 일상을 살 때보다 더 많이 준비해야 하고, 더 많이 걸어야 하고,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주는 설렘, 감동은 그 모든 ‘수고스러움’을 덮을 만큼 큰 것이어서 우리는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여행 가방을 싼다. 어쩌면 일상에서의 지긋지긋한 내가 아닌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풍경 속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음식을 먹으며 새로운 주제들로 이야기를 할 때면, 내 안의 새로운 나를 끄집어내고 있는 묘한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이 선사하는 그 뜨거움과 시원함이 일상에서 미지근하게 살고 있던 나를 일깨워주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활기차게 걸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준다. 나는 또 다음의 여행을 꿈꾸며 일상을 착실하게 살아 낼 것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날 그 설렘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