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l 21. 2023

빚진 닭 한 마리

<안중근 평전>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안중근은 거사 전에 편지를 남겼는데, 여비를 빌린 사람에게 돈을 갚아달라는 이야기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에 닭 한 마리 외상값을 갚아 달라고 제자들에게 유언했으니 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는 분명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닭 한 마리를 빚졌다고 말한 대상은 아스클레피오스다. 의술의 신이다. 물론, 우연하게 의술의 신과 이름이 같은 이웃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신들과 같은 이름을 쓰는 사례는 흔치 않았다. (챗GPT와 논쟁 완료.)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은 정확히 이렇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지고 있으니 그 빚을 소홀히 하지 말고 반드시 갚게나." (<파이돈>)


내가 빚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빚졌다고 그는 말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와 오랜 친구였으니, 그냥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스클레피오스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고 생각하면 새삼 다른 의미가 느껴진다. 즉, 우리 인간은 의술의 신에게 언제나 목숨 내지 건강을 빚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술의 신에게 제사 한 번 지내달라는 뜻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수탉 얘기는 플라톤의 책 외에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정학히 어떤 의미인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 말은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되어 매우 유명해졌다.


플라톤 말고도 소크라테스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많다. 유명한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조차 <구름>이라는 희곡을 남겼고, 이 희곡에서 소크라테스가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는지는 <변명>에서 본인이 직접 말할 정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최후 순간에 대해서 우리는 <파이돈> 외에 기록이 없고, 플라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장면을 왜곡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참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미 독약을 마셨고, 간수의 말에 따라 약 기운이 퍼질 때까지 방 안을 돌아다녔다. 손발이 굳어옴에 따라 그는 침상에 등을 대고 누웠다. 독 기운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를 파악하려고 간수와 소크라테스는 몸의 여기저기를 꼬집어 보았다. 그리고 죽음을 기다렸다. 허리 정도까지 차가워졌을 때, 문득 소크라테스가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을 들추고 크리톤에게 말한다. 수탉 얘기다.


그것이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었지요. (<파이돈>)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던 그는 왜 갑자기 그 말을 했을까?


닭 내놔


사족. 안중근은 위 글을 미리 써 놓았고, 실제로는 돈을 빌리지 못했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둔필승총 2307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