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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Mar 07. 2018

진화심리학이 보는 성폭력

설계를 알면 고칠 수 있다

연일 헤드라인을 새로 쓰는 미투 운동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 성폭력이 이 정도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거쳐야 할 성장통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진화과학의 입장에서 미투 운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진화과학에는 강간이라는 현상이 남성의 진화 전략으로 발전했다는 진영, 그리고 강간은 단지 우연의 산물이라는 진영이 대립한다. 남녀의 성차를 이해하는 데 있어 진화과학만큼 놀라운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있어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큰 투자를 한다. 포유류에 있어 이것은 오랜 임신 기간, 그리고 더 긴 이후의 양육 기간 동안 아이에 대한 투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포유류가 진화하기 훨씬 전부터 남녀의 차이는 자손에 대한 투자의 차이에서 나타났다.


양성 생식에서 각각의 부모는 자기 유전자 50%를 자손에게 물려준다. 생명체 진화의 오랜 역사 중 어느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은 단성 생식으로 인한 위험, 즉 단일 원인에 의한 유전자 세트의 절멸을 방지하는 데 탁월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부모 중 한쪽이 자손에 대해 투자를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처음에 그건 그냥 우연이었을 것이라고, 진화학자들은 말한다.


부모 한쪽은 그저 유전자 한 다발을 물려주기만 했는데, 우연히 다른 쪽은 유전자 한 다발에 더해서 약간의 양분을 더해 준 것이다. 그것이 남녀 분화의 시작이다. 정자를 만드는 데는 유전자 한 다발 외에 거의 부재료가 들어가지 않는다. 반면, 난자는 유전자 한 다발 이외에도, 오랜 기간 자손이 사용할 수 있는 영양분이 듬뿍 들어 있다. 달걀만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된다.


DNA 사슬의 한 가닥만 물려줄 것인가? 지참금을 더해 보내줄 것인가?

자손에 대한 투자 차이는 남녀간 성 전략에도 차이를 가져왔다. 자손에게 큰 투자를 하는 여성은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기에 집중 투자를 하지만, 여성에 비해 극단적으로 작은 투자를 하는 남성은 분산 투자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포유류의 특징은 남녀 간 성 전략의 차이를 더욱 강화한다. 암컷은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을 100% 확신할 수 있지만, 남성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배로 낳은 자식에 대해 집중적인 투자를 하려는 여성과는 달리, 남성은 자식에 대해 집중적인 투자를 선뜻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남자는 바람을 피우고, 단기 짝짓기 상대를 찾아 나서고, 배란기에 성욕이 집중되는 여성과는 달리 사시사철 성욕이 끓어 오른다.


이 논리의 연장 선상에서 일부 진화학자들은 강간이 남성의 진화 적응이라고 주장한다. 강간에 대한 사회적 제재가 강한 경우에도, 자신의 유전자를 끝내 후손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는 강간을 택하는 편이 우월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제재를 피할 수 없다면 최선이겠지만, 강간 이후에 사회적 제재로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대로 늙어 죽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여성에게는 강간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우월 전략이다. 자신과 자식에 대해 경제적 지원과 보호를 제공해 줄 상대를 선별해서 짝짓기를 맺는 것이 여성의 진화 적응인데, 강간 상대가 우연히 적절한 배우자가 되어 줄 가능성은 한없이 작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성폭력에 대한 방어기제를 진화적으로 발전시켰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기제는 강간을 극단적인 고통으로 느끼고 최대한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7점 만점 척도에서 여성은 강간 피해의 고통을 평균 6.5로 평가한 반면, 남성은 평균 4.8로 평가했다. 이 결과는 남자의 상상력 빈곤을 보여주는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강간에 대한 남녀의 인식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성 평등도 사회발전도 아니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다. 성폭력은 성의 문제가 아니고 폭력의 문제다. 사람들은 성욕을 해소하려고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다. 성폭력의 근본은 폭력에 기대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임상심리학의 입장에서 성폭력 범죄자는 성도착이라는 병증을 가진 사람이다. 반면, 진화심리학은 어떤 남자라도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폭력의 본질은 성이 아니라 폭력이다

진화심리학은 어떤 심리상태가 진화에 따른 적응이라고 해서 그것을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물건의 설계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 물건을 더 잘 수리할 수 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제안이다. 성폭력에 대한 남녀 인식 차이가 진화 적응에 따른 것이라면, 그 사실을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생각하는 첫 단계가 될 것이다. 지금의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를 한 계단 더 높은 곳으로 데려가는 신선한 바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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