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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03. 2023

철학이라는 사치

[책을 읽고] 김필영, <5분 뚝딱 철학> (1)

철학은 재미있다. 내 생각에는 여전히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난해한 도전 과제가 바로 철학이다. 그 철학에 빠지게 된 계기는 진리에 관한 논쟁이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연결된다. 내가 빠져 들었던 것은 존재론보다 인식론 쪽이었지만, 여기서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진리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고르기아스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고, 설령 안다고 해도 언어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문제로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 해요. (163쪽)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사실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철학이 동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르기아스의 주장은 대충 봐도 반박하기 어려워 보인다. 저 주장에 도전하려는 대담한 철학자들이 데카르트, 흄, 버클리, 후설, 하이데거였고, 그 결론 격에 해당하는 하이데거의 생각은 사르트르에 의해 왜곡되어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철학자의 이미지, 즉 '쓸데없는 문제에 고민하며 담배나 피는 사람'을 만들었다. (물론 사르트르의 왜곡이 나치의 왜곡보다는 나았다. 그런데 나치가 한 것이 과연 왜곡이었을까?)


고르기아스의 난제를 풀어낸 것이 칸트라고 저자는 말한다.


고르기아스의 도전을 확실하게 막아낸 사람이 칸트라고 볼 수 있어요. 칸트는 일단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없다는 고르기아스의 결론을 수용하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요.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원래의 세계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나타난 현상세계는 알 수 있으니 그것을 진리로 보자고 주장한 것이죠. (165쪽)



칸트가 고르기아스의 주장을 반박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임머신을 만들 수 없으니 커피머신을 만들어 놓고 앞으로는 이걸 타임머신이라고 부르자는 주장과 뭐가 다른가? (물론 커피머신을 만든 사람을 나는 깊이 존경한다.)


내 생각에, 진리의 대응성 문제를 보다 확실하게 해결한 것은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이다. (물론 나는 이들의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러셀은 서양철학의 존재론은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면서 어떤 대상도 지시하지 않는 기술구를 주어 자리에 놓음으로써,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생긴 학문이라고 합니다. (421쪽)


존재론,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 논쟁이나 중세의 보편자 논쟁을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한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수준에서 생각하면, 칸트가 아니라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이 존재론 차원에서 진리에 대한 문제를 확정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진리의 문제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일까?


나는 아직까지도 고르기아스의 난제가 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09년, 과학자들은 VR 기기를 사용하는 쥐의 해마에서 장소 세포(place cell)가 발화하는 것을 확인했다. 간단히 말해,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통 속의 뇌>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증거다.


https://www.nature.com/articles/nature08499


도교 철학에서는 일자에서 음양이 나오고 사상, 오행을 거쳐 만물이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것을 우주 질서의 숨겨진 비밀 내지 법칙에 대한 힌트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음양오행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자설이 그럴 듯해 보였던 이유는, 정말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뉴턴에서 시작된 물리학 법칙이 세상을 얼마나 바꿔 놓았는지를 생각하면,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이 돈이 안 된다고 말하기는 꽤 어렵다.


조선 시대 주자학 탈레반들이 호락 논쟁이나 하면서 노닥거리던 것을 생각하면, 조선이야말로 제발 망하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던 나라라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그런 논쟁이 가능했던 배경은 기원전 5세기 경 그리스에서 철학이 꽃 피웠던 것과 같다. 즉, 먹고살 걱정이 없는 <시민>이나 <양반>이 남아도는 시간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버클리 같은 위대한 철학자나 린네 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왜 성직자라는 직종에서 나왔는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데아의 문제가 왜 중요할까?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당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호락논쟁이 중요했던 이유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청나라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프로타고라스의 말대로 인간이 만물의 척도다. 플라톤은 그 자리에 이데아를 놓으려고 했다. 그리고 결국 기독교 탈레반들은 그 자리에 여호와를 가져다 놓았고, 인류는 꽤 오랫동안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동양에서 같은 시기 주자학 탈레반이 같은 역할을 하는 바람에, 전 세계적으로 역사가 멈추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 전, 즉 서양에서 그리스와 로마, 동양에서 송나라 때 얼마나 놀라운 발전들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단지 다락방 논쟁처럼 보이는 절대적 진리와 존재론에 관한 생각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졌는지 느껴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로타고라스


사족


나는 중세가 암흑 시대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가 멈췄다>는 표현은 근본주의자들이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과장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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