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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01. 2023

결혼과 죽음에 비친 삶의 모습

[책을 읽고] 에밀 졸라, <결혼, 죽음>

에밀 졸라의 책은 <제르미날> 하나밖에 읽은 것이 없지만, 강렬했다.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에서 홀로 목소리를 냈던 그의 용기와 정의감을 존경한다. 그래서 리디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책에는 19세기 말 당시 프랑스의 각 계층이 맞이하는 결혼과 죽음의 모습이 담겨 있다. 마치 호가스의 풍속화를 보는 느낌이다.


<결혼> 서문에서, 졸라는 19세기의 결혼이 일종의 상거래라고 표현한다. 17세기에는 영웅적이었고, 18세기에는 그나마 감각적이라도 했던 것이 이제는 하나의 공식이 되었다.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까지 일에 쫓긴다. 그러다 밤 시간은 보다 실용적인 데 쓴다. 사랑을 나누기 위해 돈을 지불한 여인과 함께. 아니면 자신에게 돈을 지불한 법적 아내와 함께. (14쪽)


어느 시대에서나 과거는 아름답게 채색되는 것이고 지금은 말세로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졸라의 시대가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프랑스에도 남녀칠세부동석이 있다는 것이다.


예닐곱 살까지 그들은 함께 섞여 논다. 어머님들이 친구이기도 해서 서로 반말을 하고 부끄럼 없이 형제처럼 뒹굴며 어울려 논다. 그러나 일곱 살 정도 되면 사회는 그들을 분리시켜 서로 대립하게 만든다. (16쪽)


이어지는 결혼 이야기들은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으로 나뉘어 있다. 지참금과 결혼식 비용, 그리고 결혼식 때 의례적으로 기부하는 빈민구호금의 규모가 달라질 뿐, 별 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차이점이 있는데, 유독 서민의 결혼에만 사랑이 있다는 것이다. 귀족은 남들의 이목이 신경 쓰이니까, 부르주아는 필요에 따라서, 상인은 침대보 세탁 비용을 아끼기 위해 한 침대에서 자는 반면, 서민 커플은 실제로 사랑을 나눈다.


소란하고도 구차한 생활 속에서 어떨 땐 데울 불도 먹을 빵도 없지만, 낡고 뜯어진 커튼 아래 놓인 침대에서는 밤이면 사랑의 애무가 날갯짓이라도 하듯 파닥거렸다. (73쪽)



죽음 역시 계층별로 나뉘어 있다. 귀족, 부르주아, 상인, 서민, 그리고 농부다. 결혼은 적령기라는 게 있으니 다소 차이가 나더라도 20~30대가 주인공인 반면, 죽음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서민> 편에서 죽는 것은 열 살 난 아이다. 가난에 찌들어 앓다가 죽은 것이다. 비 새는 월셋방에 사는 가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상인> 편에서 죽는 문방구 아줌마 역시 돈 때문에 죽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가게만 지키다 보니 폐 질환에 걸렸고, 의사가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나오는 이 시대 의사들이 늘 그렇듯) 좋은 공기를 좀 마시라고 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10년만 더 도시에서 돈을 모으고 낙향하겠다는 부부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참된 애도가 동반하는 죽음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죽음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남편이 죽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귀족>이나, 유산을 나눠 갖겠다고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세 아들이 나오는 <부르주아>보다는 낫다. 그러나 부의 크기에 반비례해서 인간성이 증가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다.


<농부> 편에 묘사되는 죽음은 마치 동물이나 식물의 죽음과 같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같은 느낌이다. 애도할 여유 같은 것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른 형제들을 부르며 큰아들 앙투안이 말했다. 이어 조젭, 카트린, 자키네가 제각기 반복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41쪽)


***


사실 <농부> 편에 나오는 죽음의 묘사가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다. <제르미날>에는 훨씬 더 충격적인 장면이 연이어 등장한다. 지금까지 읽은 모든 픽션을 돌아봐도, <제르미날>의 여주인공이 거쳐갔던 삶의 궤적보다 더 불쌍한 것은 찾기 어렵다.


1898년 드레퓌스 사건의 재수사를 촉구하고 1902년에 가스 중독이라는 의문사를 당했으니, 그가 그린 프랑스의 모습은 1800년대 후반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무리동물이었지만, 정착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다른 이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국제 인권단체들은 아직도 전 세계에 수 억 명의 노예가 있다고 주장한다. 발목 족쇄는 노예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제르미날>에 묘사된 노동자들이야말로, 지금까지 내가 간접적으로 목격한 가장 비참한 노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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