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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ug 17. 2023

내 인권 감수성 수준도 참 한심하다

[책을 읽고], 구정우, <인권도 차별이 되나요>

지금까지 직접 들은 스피치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답은 언제나 같다.

10여 년 전, 캐나다에서 회사 다닐 때 들었던 마크 툭스베리(Mark Tewksbury)의 강연이다.

그는 다양한 물건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는 다큐 쇼, <How It's Made>의 쇼 호스트였다.

그 이전에 그는 캐나다 국가대표 수영 선수였고, 1992년 올림픽 배영 100미터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회사 LGBT 동아리에서 개최한 강연회는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도 동성애는 형법으로 다스리는 범죄였다고, 그는 말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의 학창시절 이야기였다.

동성애자라는 것이 소문 나서 전학을 가게 된 그.

그러나 전학 가는 학교에는 그보다 먼저 소문이 도착해 있었다.

사물함에 이미 동성애자는 죽어버리라는 낙서가 가득했다고.


나는 학교 다닐 때 여학우들에게 대략 페미니스트로 인식되었고,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과연, 나의 인권 감수성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우선, 동성애에 대해 생각해보자.

동성애가 허용된다면, 동성 결혼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라고, 나는 믿어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두 가지가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동성애는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허용할 수밖에 없지만,

가족 제도 유지, 자녀 부양 등 사회적 기능을 가진 결혼 제도를, 그런 취지에 기여할 수 없는 동성 커플에게 인정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문제 제기다.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생각해볼 여지는 있다.

나는 이 문제를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내 인권 감수성이 한심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스펙 배제 면접에 관해 살펴보자.

입사 또는 입시 면접에서 스펙을 고려하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말이 많다.

그러나 과연 이 주장이 합당한가?

스펙도 노력의 결과라면, 그간의 노력을 무시하는 쪽이 공평하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문제는 반대편에서도 생각해야 한다.

스펙이 불공평한 조건의 결과라면, 스펙을 배제하면서까지 보려고 하는 소위 <능력>이라는 것은 공평한가?

머리가 좋거나 운동능력이 탁월한 따위의 <능력> 역시 태어나면서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조건일 뿐이다.

존 롤스가 말하는 <무지의 장막> 뒤에서는, 능력조차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능력에 따른 차별은 수용한다.


다음은 범죄자의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자.

무죄 추정의 원칙은 현대적 사법 체계의 그야말로 뿌리가 되는 원칙이다.

자유권적 기본권은 수동적 측면, 즉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서 자유롭고 싶은 측면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죄 추정은 정말 중요한 원칙이었다.

그러나, 절대왕정 시대에 필요성이 제기된 무죄 추정의 원칙이 지금 얼마나 유효한 걸까?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다 보면, 범죄 정황이 확실한데도 단지 물증이 없어 <무죄 추정>이 되는 사례를 꾸준히 목격하게 된다.


수많은 학교 폭력 사건과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의 인권은 보호되고 피해자의 인권은 보호되지 못한다.

같은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 <한공주>와 <시>를 보라.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의 삶은 무너진다.


다음은 난민 문제다.

2019년, 미국에서 유학할 때다.

같은 프로그램에 예멘 출신 여자가 둘이나 있었다.

예멘이라면, 내전 중인 바로 그 나라 아니던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예멘 지방에서는 이슬람 도래 이전부터 여성 인권이 바닥이었다고 한다.

여성 인권 바닥, 이슬람, 게다가 내전이라는 3중고를 뚫고 미국까지 온 이 사람들은 뭐지?


2018년, 제주도는 비행기로 들이닥친 예멘 난민들로 몸살을 앓았다.

비행기를 타고 입국한 난민이라는 개념은 단지 생소한 수준을 넘어 납득하기 어렵다.

알란 쿠르디는 조각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려다 익사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입국심사대에서 <나는 난민이오>라고 말하는 광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비행기를 탈 여유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전 속에서 죽어가도 된다는 말인가?


비행기를 탄 그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지 못한 사람들에게 뭔가 기회주의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잘못된 걸까?

멀리 갈 것도 없다. 그냥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보자.


난민 유입 반대를 주장하는 쪽에서 사례로 들기 딱 좋은 것이 2016년 새해 쾰른 집단 성폭행 사건이다.

당시 범죄자들 중 반 정도가 난민 신청 중이었다고 한다.

난민 신청 중에, 사람들이 잔뜩 모인 광장에서 성폭행이라니, 상상도 하기 어려운 대범함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지도 못한 인권 문제가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내 인권 감수성이 개념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도 재확인했다.


동성애자, 범죄자, 난민의 인권 보호에 대해 나는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그들이 내 이웃이라면 어떨까?

실제 문제가 마음의 문턱을 넘어오는 순간, 나는 흠칫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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